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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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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문서

등록 2008-12-11 10:16 수정 2020-05-03 04:25

문서는 차갑다. 더구나 헌장이나 법률이란 형태를 띤 경우라면 무미건조한데다 서늘함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그 문서가 작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거기엔 살과 피를 가진 인간, 그들의 아픔과 고뇌가 들어 있게 마련이다. 세계인권선언이 그렇다. 그 근저엔 나치 정권에 의해 가스실에서 숨져간 600만 명의 유대인, 비누로 만들어졌다는 그들 육체의 성분이 배어 있다. 제3세계를 식민지배하며 인류 문명의 총아임을 자부하던 서구 문명은 그 안방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야만적 살육극에 스스로 경악했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인류의 합의와 이를 보장할 갑옷 같은 약속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이르게 됐다. 여기엔 어린아이까지 살인적인 노동에 몰아넣었던 통제되지 않은 자본주의와 여성을 정치적 인격으로 인정조차 않았던 또 다른 야만 등에 대한 반성과 성찰도 더해졌다. 그 결과물이 1948년 12월10일 선포된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이다.
세계인권선언 60돌을 맞은 올해, 은 차갑고 앙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그 문서에 살을 입히고자 ‘인권 OTL-30개의 시선’ 시리즈를 이어왔다. 지난 제737호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시리즈는 국제사회에서 시민권을 획득한 지 한 갑자를 넘긴 ‘인권’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지를 돌아봤다.
현실은 차가웠고 인권은 신음하고 있었다. 취재 기자들은 공감하고 울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날로 후퇴하는 인권 현실에 OTL 시리즈는 역설적으로 더 기운을 얻었고, 30주 연속 기획이라는 전례 없는 과제를 한 주도 거름 없이 수행했다. 공감과 분노는 기자들만의 것은 아니었던 듯싶다. 독자들의 호응과 격려는 이번 기획의 가장 공로 깊은 후원자였다.
특히 청소년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제 세계인권선언의 또 다른 60년을 시작하면서 희망을 품게 되는 이유다. 국제앰네스티언론인위원회(위원장 허의도)는 OTL 시리즈를 앰네스티 언론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면서 “우리 사회 인권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총체적으로 짚었”고 “그간 거론되지 않은 인권유린 문제까지 다각도로 취재함으로써 인권 교과서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경제위기로 삶은 더 피폐해지는 요즘 할 일 없이 교과서나 바꾸겠다고 야단법석인데, 교과서에 정작 담아야 할 것은 지금의 인권 현실에 대한 솔직한 묘사와 그 현실을 개선할 방향타인 세계인권선언이 아닐까.
매회 OTL 시리즈 기사를 실으면서 인권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그럴듯한 표현을 궁리했는데, 생각은 늘 한 곳에 머물렀다. 아이의 손이다. 무언가 붙잡으려 허공을 휘젓는 아이의 작은 손. 배고픔 때문이든, 아픔 때문이든, 두려움 때문이든, 외로움 때문이든 그 손엔 뭔가 주어져야 한다. 그게 사람으로 태어난 이유이며, 한 번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누려야 할 권리이기 때문이다. 가스실에서 숨져간 그들이 무언가를 향해 내뻗었을 손에 아무것도 쥐어주지 못했던 인류의 참회가 바로 세계인권선언 아니던가. 곧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이다. 빈손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우리의 손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인권 OTL-30개의 시선’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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