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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못 보는 판사

등록 2008-12-02 10:13 수정 2020-05-02 04:25

‘앞을 못 보는 판사?’
지난 1992년 리처드 케이지 변호사가 미국 뉴욕 연방법원 판사로 천거됐을 때 는 이런 제목으로 사설을 썼다. 시각장애인으로선 첫 연방법원 판사 천거였다. 색소성 망막염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은 지 5년째를 맞던 케이지는 당시 59살이었고, 맨해튼의 연방 검사보를 지내기도 한 베테랑 변호사였다. 서류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컴퓨터 프로그램 등에도 익숙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맡아야 할 자리가 사실관계를 밝혀내야 하는 1심 법원의 판사라는 점이었다. 주로 법률 쟁점을 검토하는 항소법원과는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나 배심원을 앞에 두고 벌어지는 미국의 재판은 영화에서 보듯 우리나라보다 훨씬 역동적이지 않은가.
“민형사 1심 재판을 주재하는 판사는 변호사와 증인, 맞붙는 당사자들로 채워진 법정을 통괄하는 자리다. 편견 없는 배심원을 선정하고 법정에서 증인의 신빙성을 판단해야 하는 1심 판사에게 상대의 눈빛을 읽는 능력이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겨진다.”
는 또 지적했다. 변호사나 증인이 배심원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 은근슬쩍 손짓이나 무언의 제스처를 쓰면 어쩔 건가. 각종 시각적 증거물은 또 어떻게 판단할 건가. 신문은 케이지 변호사가 시각장애라는 삶의 부담에 더해, 판사직을 수행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입증 책임’까지 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결국 ‘아버지 부시’ 대통령 임기를 지나 1997년에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연방판사로 임명됐다. 이후 케이지의 행적을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지난해 7월 그의 사망을 알리는 부음 기사로 그 흐릿한 실루엣을 그려볼 뿐이다.
“미국의 첫 연방 1심 법원 판사로 낙태 문제와 마피아 두목 피터 고티 사건 등 굵직한 재판을 담당했던 리처드 케이지가 숨졌다. 향년 74. 그는 이른 아침 안내견 바니와 함께 출근하는 맨해튼 남부 지방법원의 터줏대감이었다. 그는 법대에 앉아서는 변호인이나 증인들에게 한결같이 무뚝뚝했다. 그러면서도 시각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유머와 (최근 들어) 스키를 즐겼다. 일각에선 시각장애인 판사가 증인의 신뢰성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케이지 판사는 말했다. ‘팩트들의 일관성과 논리적인 연관성을 추적하다 보면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다.’ 물론 시각 증거물에 크게 의존해야 하는 경우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사건이라도 때로 동료 판사에게 넘겼다.”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에 시각장애인 최영(27)씨가 포함됐다.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변호사라면 몰라도 판검사직을 수행하기는 어렵지 않겠냐’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에 기고한 한 독자는 “장애가 어떤 직책을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되는지를 장애인 자신이 입증해야 한다는 생각을 퍼뜨려선 안 된다”고 사설을 반박했다. 그렇다. 최씨가 판검사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을 법원이나 검찰이 분명히 입증할 수 없는 한 그에겐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한다.
최근 교육과학기술부는 우리나라 주요 분야 기술이 세계 최고와 비교할 때 72.8% 수준으로, 6.8년가량 뒤져 있다는 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우리의 역량 부족에 대한 질타와 더 힘내야 한다는 자기최면이 이어졌다.
따져보자. 미국에서는 1969년에 이미 시각장애인변호사협회가 설립됐고(장애인 변호사 첫 배출이 아니다), 현재 수백 명의 회원이 활동 중이다. 우리는 최소한 40년가량 뒤져 있는 셈이다. 정확한 자료가 없어 미국의 첫 시각장애인 판사가 배출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연방법원 판사였던 케이지의 경우만 생각해도 앞으로 우리나라에 첫 시각장애인 판사가 나오는 데 걸릴 햇수에 11년을 더한 기간만큼 우리는 뒤지게 된다. 왜 이를 한탄하지 않는가.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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