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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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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혼의 외침

등록 2008-09-02 00:00 수정 2020-05-03 04:25

장장 50여 년이다. 손을 뒤로 묶인 채 구덩이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생은 짧게만 느껴졌다. 주마등처럼 까물거리며 머릿속을 훑고 지나는 한 삶의 기억들이 스스로 처연했다. 보고 싶은 이들이 많았다. 등 뒤에서 카빈소총이 불을 뿜고 탄두가 머리뼈를 부수며 들어왔을 때, 사랑하는 그 사람들의 마지막 영상이 일그러지며 세상은 암전됐다. 그로부터 강산이 다섯 번 바뀌었다.
구덩이는 서둘러 메워지고 그 위에 풀과 이끼가 자라고 낙엽이 쌓이고 삭풍과 장마가 갈마들며 우리네 이름마저 풍화되어 사라졌다. 사람들의 정신을 얼어붙게 한 냉전의 시대, 국군이 민간인 수백 명을 이리로 끌고 와 사살했다는 소문은 바람결을 타고 사람들 입가에서 귓가로 숨어다녔을 뿐, 누가 왜 이 구덩이에 처박혀야 했는지는 칠흑 같은 세월 단단한 봉인 아래 묻혀 있었다. 누구도 알려 하지 않았다.
하나, 우리도 한 목숨이었거늘.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상업학교에 다니던 까까머리 청년이었고, 삼단 같은 머리에 은비녀 꽂은 흰 저고리의 아낙이었고, 전쟁통 험한 세상에 처자식 거둬 먹여야 하는 남정네였고, 생이별한 피붙이 걱정에 한시도 시름 놓지 못하던 부모였거늘. 과거에 좌익활동을 했든 혹은 강요에 못 이겨 인민군에 부역을 했든, 짐승 도살하듯 이름 한 글자 남기지 않고 죄물음도 없이 총질로 목숨을 앗다니, 이들이 어찌 신원(伸寃) 없이 잠들 수 있겠느냐. 하물며 아무런 허물 없이 영문도 모른 채 죄다 오라는 대로 따라갔다가 뜨거운 피를 쏟아야 했던 우리네야 말해 무엇하랴.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들짐승만도 못하게, 썩어 문드러진 유골 주위에 교복 단추나 은비녀, 옷핀, 시곗줄, 검정고무신 따위만 흩뿌려 남겼을망정, 우리도 사람 목숨이었거늘.
세상이 정신을 차리고 우리네 한 맺힌 뼛조각이나마 수습한다고 하나, 아직 유골마다 이름도 찾아주지 않아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습된 넋들이 흠향조차 못한 채 시신보관실 한켠에 뒤엉켜 버려져 있으니, 장장 50여 년의 기다림이 야속할 지경이다.
그래, 이런 목숨 소중히 다루지 않고서 너희 어찌 사람의 목숨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인륜과 민주와 공화를 말할 수 있겠느냐. 전쟁과 야만의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을 문명의 방어벽을 쌓겠느냐. 옛일에서 배움이 없다면 어느 날 또다시 광기가 뭇사람의 뒤통수에 총구를 겨누고 사람의 존귀함은 물·바람·흙 속으로 흩어지고 마는 세상이 부지불식간 찾아올 수도 있는 일. 아득하여라, 종족을 대하는 저 인간들의 짐승만도 못한 정성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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