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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약진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승자는

영국·프랑스 조기 총선 결과 노동당과 ‘공화국 전선’ 이겼으나… 득표율 따져보면 극우도 ‘성장’
등록 2024-07-12 12:50 수정 2024-07-13 12:29
영국 개혁당의 나이절 패라지 당대표가 2024년 7월5일 하원의원 당선 기념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영국 개혁당의 나이절 패라지 당대표가 2024년 7월5일 하원의원 당선 기념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영국과 프랑스에서 조기 총선이 치러졌다. 영국에선 예상대로 노동당이 압승을 거뒀다. 보수당을 몰아내고 14년 만에 재집권했다. 1차 투표에서 극우세력의 집권 가능성이 점쳐졌던 프랑스에선 2차 투표에서 좌파가 약진하며 ‘우려’를 걷어냈다. 확보한 의석수만 놓고 보면 유럽에서 느닷없이 ‘좌파 바람’이 부는 모양샌데, 저변에 흐르는 민심의 동향이 심상찮다. 득표율까지 꼼꼼히 따져보면, 영국과 프랑스 선거의 ‘진정한 승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유럽에서 극우는 더 이상 ‘유령’이 아니다.

‘부자 감세’ 추진한 전 총리, 텃밭에서도 낙마

리시 수낵 전 영국 총리가 조기 총선을 치르겠다고 발표한 것은 2024년 5월22일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이 노동당에 평균 ‘20 대 40’ 이상으로 밀리는 상황이 장기간 이어지면서, 이른바 ‘빨리 맞는 매’를 선택한 게다. 실수였다.

7월4일 영국에서 하원의원 650명을 뽑는 선거가 실시됐다. 노동당은 2019년 총선 때보다 무려 214석을 늘린 412석을 확보하는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보수당은 252석을 잃으며 단 121석을 얻는 데 그쳤다. 극심한 재정적자 속 ‘부자 감세’를 추진했다가 취임 50일 만에 낙마했던 리즈 트러스 전 총리는 오랜 텃밭인 사우스웨스트노퍽에서 노동당 후보에게 밀리며 ‘총선에서 떨어진 첫 전직 총리’가 됐다. 유례를 찾기 어려운 참패였다.

‘만년 제3당’인 자유민주당도 64석을 늘려 74석을 얻었다. 이튿날 ‘다우닝가 10번지’(총리 관저)에 입주한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는 (야당이 집권을 염두에 두고 구성한 예비 내각인) ‘그림자 내각’ 재무장관(부총리 격) 레이철 리브스를 영국 사상 첫 여성 ‘다우닝가 11번지’(재무장관 관저) 입주자로 지명했다. 스타머 총리가 전통적인 ‘좌파 노선’이 아닌 토니 블레어 전 총리로 대표되는 ‘제3의 길’을 따르긴 하지만 영국에서 개혁과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 건 분명해 보인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유럽회의주의’와 ‘외국인 혐오증’을 기치로 내건 극우 성향의 신생 정당인 개혁당이 약진했다는 점이다. 8번째 하원의원 도전에 나선 나이절 패라지 당대표도 무난히 당선됐다. 영국독립당(UKIP) 소속으로 유럽의회 4선 의원을 지낸 패라지 대표는 2015~2016년 당시 런던 시장이던 보리스 존슨 전 총리(보수당)와 함께 영국의 ‘탈유럽연합’(브렉시트) 운동을 주도한 바 있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공식 탈퇴(2020년 1월)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치른 유럽의회 선거(2019년 5월)에서 패라지 대표가 이끈 ‘브렉시트당’은 30.5%의 득표율로 ‘제1당’ 지위에 오른 바 있다. 하지만 2019년 12월 총선에선 단 2%의 득표율(총 득표수 약 64만 표)로 의석을 단 1석도 얻지 못했다. 이번엔 어땠을까?

패라지 대표를 포함해 당선된 의원은 5명에 그쳤지만, 개혁당의 전국 득표율은 14.3%에 달했다. 득표수도 410만여 표나 된다. 74석을 얻은 자유민주당의 득표율(12.2%)과 득표수(351만여 표)를 앞선 사실상 ‘제3당’으로 약진했다. 노동당의 압승에 가려진 영국 조기 총선의 암울한 그림자다.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전 대표가 2024년 7월7일 총선 결선투표 출구조사 결과 발표 직후 당사로 들어서고 있다. AFP 연합뉴스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전 대표가 2024년 7월7일 총선 결선투표 출구조사 결과 발표 직후 당사로 들어서고 있다. AFP 연합뉴스


극우 집권 가능성에 ‘공화국 전선’ 뭉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조기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한 건 유럽의회 선거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된 직후인 6월9일 저녁이다. 마크롱 대통령의 소속 정당인 르네상스당(RE)이 참여한 중도우파 연합이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파 국민연합(RN)에 참패한 탓이다. 유럽의회 집계 결과, RN 쪽은 2019년 선거 때보다 지지율을 약 10%포인트 끌어올리며 32%의 득표율로 프랑스에 할당된 81석 가운데 30석을 확보했다. RE 쪽은 그 절반에도 이르지 못한 14.6%를 득표해 13석을 얻는 데 그쳤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는 마크롱 대통령의 조기 총선 결정은 처음부터 무모한 ‘도박’으로 보였다.

실제 그랬다. 6월30일 치른 총선 1차 투표에서 RN은 33.1%의 득표율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과반 득표로 1차 투표에서 당선을 확정 지은 후보 76명 가운데 RN 소속이 37명에 달했다. 7월26일 개막하는 파리 여름올림픽은 ‘극우 총리’가 주관할 것이란 말이 떠돌았다. ‘극우 집권 가능성’이란 누란의 위기 앞에서 서로 물어뜯던 좌파와 중도우파는 ‘공화국 전선’으로 뭉쳤다.

프랑스에선 총선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결선투표를 치른다. 1차 투표 1·2위 후보가 다투는 여느 나라와 달리, 1차 투표에서 12.5% 이상 득표한 후보 모두 결선에 나설 수 있다. 전체 577석 가운데 1차 투표에서 당선이 확정된 76석을 뺀 501석을 두고 결선투표를 치르게 됐다. 이 가운데 300여 석이 3자 또는 4자 대결 구도였다. 좌파연합 신인민전선(NFP)과 마크롱 대통령이 이끈 중도우파 앙상블(ENS)은 ‘후보 단일화’에 승부를 걸었다. 7월7일 결선투표 결과, NFP는 기존보다 57석을 늘린 188석을 얻으며 ‘제1당’에 올랐다. ENS 쪽은 76석을 잃은 161석에 그쳤지만, ‘제2당’이 됐다. 1차 투표에서 압도적 승리를 예상했던 RN은 53석을 늘린 142석을 확보하며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뒀지만, ‘제3당’에 그쳤다. 극우는 ‘실패’한 걸까?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 유럽판은 7월7일 프랑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를 따, “2019년 때 RN은 17.3%를 득표해 89석을 얻었다”고 전했다. 142석을 얻은 이번 총선에선 유럽의회 선거 때 득표율보다 5%포인트 남짓 높은 37.1%를 득표했다. 총 득표율로만 따지면 NFP(26.3%)와 ENS(24.7%)를 압도한 ‘제1당’이란 뜻이다. 출구조사 발표 직후 “우리의 집권은 늦춰졌을 뿐”이라고 말한 조르당 바르델라 RN 당대표의 발언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유럽의회 ‘제3당’도 극우 진영 교섭단체

7월8일 RN 쪽은 헝가리 극우 총리 오르반 빅토르가 제안한 극우 진영의 새로운 유럽의회 교섭단체 ‘유럽을 위한 애국자’(PfE)에 참여한다고 밝혔다. 바르델라 당대표가 PfE 대표를 겸직하기로 했단다. 이로써 PfE는 중도우파 유럽국민당(EPP)과 중도좌파 사회민주동맹(S&D)에 이어 유럽의회 ‘제3당’이 됐다. 아뿔싸.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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