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감염을 이유로 자가격리에 들어갔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결국 대선 후보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재난’으로 불린 첫 대선 후보 토론회(2024년 6월28일) 직후 ‘후보 교체론’이 불거진 지 불과 3주 남짓 만에 내린 전격적인 결정이다. 빗발치던 안팎의 비판은 ‘사익’(재선) 대신 ‘공익’(대선 승리)을 앞세운 그의 선택에 대한 찬사 일색으로 바뀌었다. ‘전당대회 효과’를 톡톡히 누리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전투 모드’로 돌아섰다. 바이든 대통령의 ‘결심’은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재선 도전에 나서는 게 애초 의도였다. 하지만 대선 후보직에서 물러나 남은 임기 동안 오로지 대통령으로서 직무에 충실하는 것이 민주당과 미국에 최선이라고 믿는다.” 바이든 대통령은 7월21일 델라웨어주 러호버스비치 사저에서 공개한 짤막한 성명에서 이렇게 밝혔다. 반세기 ‘워싱턴 인사이더’로 살아온 노정객의 회한이 묻어난다. 오랜 정치적 동지까지 사퇴를 압박할 때도 ‘완주’를 다짐했던 그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암살 미수 사건만 벌어지지 않았어도, 그는 끝까지 버텼을지 모른다. ‘트럼프 재집권’이란 최악은 막아야 한다는 현실론이 그를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1942년 11월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에서 태어났지만, 1953년 가족이 이주한 델라웨어가 사실상 고향이다. 그곳에서 대학을 마친 바이든 대통령은 뉴욕주 시러큐스대학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변호사 생활을 하던 그는 1970년 델라웨어주 뉴캐슬의 기초의원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그는 ‘베트남전 철수, 민권 강화, 의료권 보장’ 등 진보적 공약을 내걸고, 노동운동 진영의 광범위한 지지 속에 1972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의 나이 만 30살을 한 달 남긴 시점이었다.
당선 직후 벌어진 교통사고로 아내와 맏딸을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는 이듬해 ‘최연소 상원의원’으로 워싱턴 정가에 화려하게 진출했다. 이후 그는 2008년까지 임기 6년의 상원의원 선거에 거푸 출마해 매번 당선됐다. 상원의 핵심인 법사위원장(1987~1995년)과 외교관계위원장(2007~2009년)을 지내며 당내 중진으로 입지도 굳혔다. 2008년 당연직 상원 의장인 부통령 출마와 함께 치러진 델라웨어주 상원의원 선거에서도 그는 지지율 64.7%로 당선되며 ‘7선 의원’ 반열에 올랐다. 이후 부통령 연임 기간까지 포함하면 그는 모두 44년 동안 ‘상원의원’ 신분을 유지했다. 초선 때 ‘최연소’였던 그가 52년 뒤 ‘고령 리스크’로 대선 후보에서 낙마한 것은 지독한 역설이다.
미국에서 현직 대통령이 재선 도전을 포기한 전례는 두 차례 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린든 존슨 대통령이다. 트루먼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은 공통점이 여럿이다. 두 사람은 바이든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민주당 소속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4년 대선에서 당선된 뒤 이듬해 4월 숨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사망 당시 63살)의 부통령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0년 대선에서 당선된 뒤 1963년 11월 암살된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부통령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두 사람 모두 당내 경선 결과가 나오기 전에 후보직에서 물러났다. 후보직을 확정지은 뒤 사퇴한 건 바이든 대통령이 유일하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1951년 미 수정헌법 제22조가 비준됐다. 4년 임기 대통령의 3선 도전이 금지됐고, 전임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2년 이상 채운 현직 대통령은 재선 도전에 나서지 못하도록 하는 게 뼈대다. 다만 1952년 대선 때는 적용이 유예되면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잔여 임기 3년9개월여를 채운 트루먼 대통령도 출마가 가능했다. 당내 후계구도가 불명확했던 그는 1952년 대선 때 출마를 강행했다가, 당내 경선 초반 뉴햄프셔주 예비선거에서 패한 뒤 후보직에서 자진 사퇴했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지지했던 애들레이 스티븐슨 일리노이 주지사는 민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됐지만, 본선에서 ‘전쟁 영웅’인 공화당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참패했다.
‘뉴딜주의자’였던 존슨 대통령은 집권 기간 사회복지 확대와 민권법 통과 등 ‘위대한 사회’ 정책을 통해 ‘우리가 아는 미국’의 기초를 다졌다. 승계한 케네디 대통령의 잔여 임기가 2년이 안 된 터라, 그의 1968년 대선 출마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민주당 진보파의 ‘반전 후보’로 나선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이 그해 3월12일 치러진 뉴햄프셔주 예비선거에서 42%를 득표하며 존슨 대통령(49%)을 압박했다. 존슨 대통령이 흔들리자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경선 합류를 결정했다. 민주당 경선 판도가 ‘매카시-케네디 체제’로 재편됐다. 존슨 대통령은 뉴햄프셔 경선 19일 뒤인 같은 해 3월31일 평화회담 촉진을 위해 북베트남 공습 중단을 선언하며, 대선 후보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자녀들이 먼 전장에 나가 있고, 미국의 미래가 국내에서 도전받고 있다. 매일이다시피 미국과 세계 평화에 대한 희망이 위협받고 있다. 단 한 시간, 단 하루라도 미국의 대통령이란 엄중한 의무 외에 사적인 당파적 이익을 좇아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나는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되려고도, 후보직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겠다.”
후보 사퇴 이후에도 존슨 대통령은 당내 경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결국 그의 부통령이던 휴버트 험프리가 대선 후보로 결정됐다. 이에 반발한 반전 시위대가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린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유혈진압됐고, 전당대회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험프리 부통령은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에게 20%포인트 이상 뒤졌다. 그해 11월 대선에서 두 후보 간 전국 득표수는 약 50만 표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닉슨 대통령은 37개 주에서 승리한 반면 험프리 부통령은 13개 주에서 이겼다. 매카시 상원의원과 반전운동 진영 포용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던 게 결정적 패인이었다. 2024년의 민주당은 1968년의 실수를 피할 수 있을까? 2024년 민주당 전당대회(8월19~22일)도 시카고에서 열린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윤석열, 헌재에 “2시간짜리 내란이 어디 있냐” 답변
윤석열 체포…현직 대통령으론 헌정사상 처음
체포 윤석열 “불법의 불법의 불법”…묵비권 걱정 안 되는 600자 담화
“윤석열 체포 영웅은 경호처 직원”…부당지시 거부 용기에 박수
윤건영 “경호처 창립기념식을 ‘윤석열 생일 파티’로 둔갑시켜”
윤석열, 헌재에 “포고령은 김용현이 베낀 것”…부하에 떠넘기기
설 민생지원금 1인당 50만원까지…지자체, 내수경제 띄우기
[단독] 윤석열, 헌재에 “민주당 독재 막는 게 민족의 절대 의무”
한덕수 “모든 국민 법률 따라야”…윤석열 수사 타당 취지 발언
윤석열 방탄 나경원 “아무리 살인범이라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