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에 들어선 이후 크리스티, 소더비 등 세계 경매시장에서 베트남 출신 화가들의 그림이 높은 가격에 팔렸다는 소식이 자주 들린다. 베트남 화가 가운데 프랑스로 이주해 활동한 레포와 마이쭝트의 그림은 이제 경매시장에서 한 점당 15억원에 거래된다. 이들은 프랑스 식민지배 아래 1925년에 설립된 인도차이나미술학교 1기 입학생이다.
현존하는 화가들도 호평받는다. 예컨대 당쑤언호아의 그림은 2008년 싱가포르의 보로부두르 경매에서 9만4천달러에 팔렸다. 우리돈으로 1억원 넘는 금액이다. 당쑤언호아는 하노이의 ‘갱 오브 파이브’ 중 한 명으로, 베트남이 개혁에 착수한 뒤 1990년에 함께 전시회를 열어 미술계에 개혁 바람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베트남이 1986년 제6차 공산당대회에서 ‘도이머이’(Doi Moi·쇄신)를 선포한 뒤 개혁정책을 채택할 때, 이들은 기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새 미술사조를 이끌었다. 예술품을 가격으로만 매길 수는 없지만, 이처럼 세계 미술시장에서 베트남 화가들의 그림이 주목받고 높은 가격에 매매되는 것은 그들 작품의 예술 가치가 높이 평가받음을 방증한다.
이 가운데 당대에 가장 널리 언급되는 화가가 부이쑤언파이(이하 파이)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배, 독립과 분단, 개혁 이전 사회주의와 개혁 시기를 살아낸 인물이다. 베트남 현대사를 몸에 그대로 담고 있다. 베트남은 19세기 말에 프랑스 식민지로 전락했다가 1945년 독립을 선포했지만, 프랑스가 다시 식민지배를 복구하려 획책해 1946년 말부터 8년간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치른다. 베트남은 1954년 분단된 뒤 사회주의 북부와 자유주의 남부의 대치, 남북 베트남 및 외부 세력과의 전쟁을 치러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과 이념이 넘쳐나는 시기를 겪었다. 파이는 이러한 베트남의 굴곡진 현대사를 온전히 살아냈다. 그의 일생을 통해 베트남의 보통 사람들이 현대사를 어떻게 살아왔는지 엿볼 수 있다.
파이는 1920년 하노이 남쪽 하동에서 났고, 하노이 항티엑 거리에서 자랐다. 그는 1936년 인도차이나미술학교 예비과정에 들어갔고, 1941년 마지막 기수로 정식 입학했다. 당대 최고의 화가인 또응옥번, 남선 등에게서 배웠다. 독립전쟁으로 인도차이나미술학교가 1945년 문을 닫자, 파이는 또응옥번이 전쟁터를 벗어나 산악지대에 연 ‘항전 학급’을 1946년 졸업한다.
파이도 당시 여느 젊은이처럼 프랑스에 저항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끄우느억>(구국) 신문, <부이송>(삶) 신문에서 일했고, 제3군구 정보문화실에서도 일했다. 파이는 베트민에 동조해 활동한 혐의로 호아로수용소에 15일간 구금되기도 했다. 베트민은 프랑스와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해 1941년 결성된 대표적 민족운동단체로, 1945년 9월 베트남의 독립을 주도한 바 있다. 이후 그는 1952년 하노이로 돌아와 투옥박 거리에 있던 그의 아버지 집에 스튜디오를 열었다. 파이는 1955년 다시 연 미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잡지 <년반>(인문)과 <자이펌>(가품)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 두 잡지는 당시 문학계에서 단일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조를 추구하던 자유문예운동의 기수였다. 이들은 이내 공산당의 비판을 받았다. 파이는 여기에 삽화를 그린 것으로 인해 미술대학을 그만둬야 했다. 파이의 사직은 가족에게 어려움을 안겨줬다. 파이의 부인은 간호사로 일하며 가정을 꾸렸고, 파이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했다.
파이는 1958년부터 전업 작가의 길을 걷는다. 가난한 작가의 고된 길이었다. 그는 병사를 그리기보다 가족을 그렸고, 전장을 그리기보다 하노이 거리를 그렸다. 그는 이때부터 하노이 옛 거리를 연작으로 그렸다. 하노이 구시가지 36거리를 거닐며 옛 거리를 주시했고, 집에 돌아와 이를 화폭에 옮겼다. 거리를 주시하느라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파이는 미술계 주류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는 이념과 시대 조류에 휘둘리지 않고 순수회화를 고집한, 조금은 ‘반골적’ 성향을 보인 화가였다. 어느 영화감독은 파이와 함께 공동작업을 하고 싶었으나, 파이가 정치적·사회적으로 문제가 있으니 협력하지 말라는 주위 사람들의 충고를 들어야 했다고 한다. 남북 베트남 및 미국과의 전쟁이 한창일 때, 화가들은 전쟁의 극렬함과 승리의 전망을 그렸다. 사회주의체제가 분단된 북부에 정착하고 통일 뒤 전국에 건설될 때, 화가들은 농촌과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농민과 노동자를 그렸다. 화단은 항전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주류로 자리잡았다. 국가의 부름에 따르지 않는 화가는 극히 소수였다. 대부분의 화가는 ‘혁명 화가’였다. 파이는 이런 시대 흐름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가 그린 여성 민병 그림은 몇 점 되지 않고 그들이 영웅적 전사로 표상되지도 않았다. 그저 보통 사람들의 표정을 지닌 인간적 모습일 뿐이었다.
1980년대 후반 베트남인 화가와 결혼한 러시아인 나탈리야 크라옙스카야는 파이의 그림을 외국인에게 알음알음으로 소개했다. 파이는 1984년에야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전시회는 성공적이었고, 국립미술박물관도 그의 그림을 세 점 살 정도였다. 파이는 1985년 하노이문화예술회 집행위원으로 들어갔다.
베트남은 1980년대 후반 개혁에 착수했고, 1980년대 말에 그림을 판매하는 화랑들이 생겼다. 크라옙스카야도 ‘살롱 나타샤’라는 이름으로 자기 집을 개방해 파이의 그림을 선보였다. 파이의 그림을 여러 점 가지고 있던 카페 럼(Lam)의 주인 응우옌반럼도 그의 그림을 팔았다. 파이의 그림은 세계 수집가들의 주목을 받는다. 안타깝게도 파이 그림의 총목록은 존재하지 않았고, 가짜 그림들이 나돌았다. 하지만 파이가 세간의 호평을 즐긴 시간도 길지 않았다. 1988년 6월 폐암으로 사망한 것이다.
파이는 ‘포꼬 하노이’, 즉 ‘하노이 옛 거리’를 그린 대표적 화가다. 그는 하노이 거리와 사람들의 혼을 화폭에 담았다. 사람들은 파이가 그린 옛 거리를 ‘포 파이’라고 부른다. ‘파이의 거리’라는 뜻이다. 베트남 국가인 진군가를 작곡한 반까오가 ‘포 파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어 파이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파이는 하노이 옛 거리의 모습을 직선과 곡선의 조합으로 부드럽게 그려냈다. 진한 갈색의 기본 톤은 회색과 잿빛이 도는 흰색과 조화를 이루며 곰팡이 핀 건물을 드러낸다. 1980년대 중반부터 그린 거리는 좀 밝아진다. 농촌 사람들의 삶은 부드러운 선으로 화폭에 담겼다. 누런 벌판과 곡식 더미가 풍성한 농촌의 모습을 보여준다. 산악지대와 해변 풍경은 밝은 색조로 표현됐다. 통일 뒤 방문한 남부 사이공 거리의 모습은 빨간색과 노란색을 주로 쓰면서 초록색으로 포인트를 줘서 밝게 표현했다. 하노이 옛 거리의 풍경과는 대조적이다. 전통가극 ‘째오’를 공연하기 위해 막 뒤에서 준비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화려하게 그려졌다.
이처럼 도시와 농촌, 산간지대와 해변 등을 그린 그의 작품은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지만, 덥수룩한 수염에 수척한 자화상은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슬픈 눈빛을 띠고 있기도 하다. 그의 자화상은 현대 베트남의 어려운 시기를 이겨낸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이다. 어느 평자는 파이의 자화상을 “시대의 슬픔을 나타낸 얼굴”이라고 했다. 곧 편하지 않은 시간을 많이 겪어낸 그의 일생의 복합체다.
베트남 정부는 1996년 민족문화에 기여한 공로로 파이에게 문화예술 부문 호찌민상을 수여했다. 첫 호찌민상 수상자 명단에는 베트남 화단의 거장인 또응옥번, 응우옌상, 응우옌뜨응이엠, 쩐반껀 등의 이름도 함께 올랐다. 이로써 파이의 명성을 국가가 사후에 승인했다. 혁명과 전쟁에서 희생하지도 않았고 정부의 선전예술에 동조하지도 않았던 파이가 최고상을 받은 것은, 그의 예술세계를 민족예술의 한 장르로 새롭게 자리매김한 결과였다. 그것은 죽기 일곱 시간 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한 화가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이한우 전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서강대 동아연구소 연구진이 연재한 ‘인물로 보는 동남아시아’ 연재를 끝냅니다. 그간 수고해주신 필자와 사랑해주신 독자께 감사합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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