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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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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의 투사’ 페낭 화인 우롄테, 세 번의 귀향 [인물로 본 동남아시아]

중국계 혈연-영국 식민지의 신민-말라야의 화인까지 3중 정체성
케임브리지대학 첫 아시아인 의학박사… 아편 무역에 맞서고 중국 의료 선진화 지휘
등록 2023-03-31 23:19 수정 2023-06-02 19:25
우롄테(왼쪽 둘째)와 맏아들 창겅(왼쪽 셋째), 1935년. 위키미디어 커먼스

우롄테(왼쪽 둘째)와 맏아들 창겅(왼쪽 셋째), 1935년. 위키미디어 커먼스

1957년 독립한 말레이시아의 국민을 구성하는 3대 종족은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이다. 얼마 전 오스카상을 탄 배우 양자경을 보통화(표준 중국어) 양쯔충으로 발음해서 논란이 일었는데, 그녀가 말레이시아 이포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름의 표준어와 방언 발음도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혼란인데, 핏줄은 중국계이지만 동남아시아에서 나고 자란 많은 화인(중국인)이 종종 부딪히는 문제다.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나고 페낭에 묻힌 의사 우롄테(Wu Lien Teh, 1879~1960)도 마찬가지다. 한자로 오연덕(吳連德)이고, 현대 중국어론 우롄더지만 중국 광둥성 출신인 아버지의 방언으로 읽으면 응린턱(Ng Leen Tuck)에 가깝다. 각기 다른 발음만큼이나 우롄테의 인생행로도 굴곡이 컸다. 그는 영국여왕장학금을 받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10년 만주에서 발병한 폐페스트를 퇴치해 ‘역병의 투사’란 국제적 명성을 쌓은 인물이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돌연 말레이시아로 귀향해 페낭과 이포에서 ‘동네 병원’ 의사로 여생을 보냈다. 우롄테의 세 번에 걸친 이향과 귀향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의 복잡한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국 식민지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난 화인에겐 혈연으로 이어진 중국, 식민지 종주국 영국, 그리고 고향 말레이시아의 삼중성이 그것이다.

1920~1921년 중국 만주 지역에서 폐페스트가 대유행하던 당시 의료용 마스크를 쓴 우롄테 (오른쪽). 위키미디어 커먼스

1920~1921년 중국 만주 지역에서 폐페스트가 대유행하던 당시 의료용 마스크를 쓴 우롄테 (오른쪽). 위키미디어 커먼스

첫 번째 귀향: 런던-페낭

17살의 영재 우롄테는 1896년 5월 영국여왕장학생에 선발됐다. 1885년 싱가포르-페낭 해협식민지의 전도유망한 청년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만든 장학제도의 특별한 수혜자가 된 것이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7년간 선진 의학과 서양의 근대를 체험하고 1903년 런던에서 귀향하면서 그는 진지하게 과거를 돌아보고 조상의 나라인 중국에 관해 모를뿐더러 한자로 자기 이름조차 쓸 수 없다는 사실에 심란해졌다. 1903년 9월 우를 태운 여객선이 싱가포르에 기항하자 영국여왕장학생 10년 선배이자 싱가포르 화인사회의 신세대 지도자로 자리 잡은 림분켕(林文慶, 1869~1957)이 마중을 나왔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송옹샹과 함께 <해협화인 매거진(SCM)>을 발행하며, 해협식민지 입법위원회 민간의원에 선출된 전도유망한 엘리트였다. 당시 우롄테는 영국이 쿠알라룸푸르에 신설한 슬랑오르 의학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추천받은 상태였다. 그는 영국의 2등 신민으로 의학연구소 연구원을 할 것인가, 영국 의학박사 학위를 내세워 병원을 개업할 것인가를 림에게 상의했다. 림분켕은 의사의 소명 말고 사회활동도 열심히 하길 촉구했다. 세상의 질병을 고치는 사회적 의사의 길을 가라는 것이었다.

우롄테가 페낭에 도착하자 가족, 친지 모두 마중을 나와 금의환향을 축하했다. 영국 의학박사 우에게 페낭의 부호들이 궁금해한 것은 “결혼은 했나? 혹여 마음에 둔 영국 여인이 있나?”였다. 중국에서 태어나 맨손으로 페낭에 이주한 신커(新客)에서 자수성가해 일가를 이루고 딸을 둔 라오커(老客)까지 너나 할 것 없었다. 페낭의 매파들은 바빠졌다. 우의 아버지는 1850년대 초 16살로 페낭에 이주한 ‘신커’였다. 당시는 말레이반도에서 주석 개발 붐이 일면서 믈라카해협 북부에 ‘페낭 화인권’이라는 강력한 교역망이 확장되던 시기였다. 우의 아버지는 5남3녀의 넷째였는데, 골드러시를 좇아 두 형은 미국에, 동생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쿨리(19~20세기 외국으로 간 아시아 출신 저임금 단순노동자. 주로 인도와 중국 출신을 말함)로 팔려갔다. 남부 광둥성과 푸젠성 중국인의 삶은 이처럼 신산하기만 했다. 광둥에 남은 부모와 형제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건 페낭으로 간 우의 아버지뿐이었다. 그는 페낭에서 금은방 도제로 출발해 이내 사업 수완을 발휘하며 재산을 쌓았다. 여덟 번째 아들 우롄테에게 페낭은 태어난 곳이자 묻힐 곳이었다.

중국 체류 시절의 우롄테, 1910~1915년. 위키미디어 커먼스

중국 체류 시절의 우롄테, 1910~1915년. 위키미디어 커먼스

두 번째 귀향: 쿠알라룸푸르-페낭

우는 이내 페낭을 떠나 말레이연방(FMS)의 수도 쿠알라룸푸르로 갔다. 1870년대 들어 영국 제국주의가 말레이반도 전체를 ‘영역 지배’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말레이 술탄들의 왕국들을 묶은 것이 FMS다. FMS가 이후 오늘날의 말레이시아로 진화한다. 식민지 인민의 보건복지도 돌본다는 징표로 영국 제국주의가 1903년 문을 연 곳이 의학연구소였다. 말레이 밀림에서 주석광산 개발이 확대되면서 급격히 일손이 늘어났는데 말라리아와 각기병, 콜레라가 창궐해 노동력 손실이 커지자 급히 이에 대처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케임브리지대학 의학박사이자 파스퇴르연구소 연구원을 지낸 1급 의료인 우였지만, 여기서는 그저 말단 연구원이었을 뿐이다.

대신 우는 여기서 자기처럼 페낭에서 태어나 타향인 말레이반도에서 역량을 발휘하던 동향 친구들을 얻었다. 이들은 스스로 ‘페낭 디아스포라’라고 했다. 이들의 정체성은 중국 황제의 신민도, 영국 여왕의 신민도 아닌 ‘중국계 페낭인’이었다. 림분켕의 조언을 따라 우는 페낭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슬랑오르 문학토론회’를 조직했다. 훗날 쿠알라룸푸르의 건설자로 추앙되는 얍아로이(葉亞來, 1837~1885)의 저택에서 1894년 6차례의 토론회가 열렸다. 영어로 말하기, 청일전쟁, 영어와 중국어 이중언어 교육, 중국인의 변발, 중국인의 혼례, 영국 신민으로서 해협화인의 의무 등이 토론 주제로 올랐다.

특히 변발에 대한 찬반 토론이 팽팽했다. 변발은 중국인 개혁의 첫걸음이라는 주장과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단발론이 압도적 지지를 받자, 페낭 디아스포라 한 명이 나서더니 “내 변발을 잘라달라”고 외쳤다. 우롄테가 영국에서 가져온 수술용 가위를 들고 “일생일대의 순간이다. 결정을 후회하지 않겠나?” 묻자, 그는 “후회는 없다”고 단호하게 답했다. 돼지 꼬리 같은 머리가 순식간에 잘렸다. 마치 유럽산 근대가 중국의 전통을 절단하는 의례를 방불케 했다. 이 토론회에서 “말라야(국가 개념인 말레이시아와 대비되는 국가 성립 이전 땅의 개념으로 현재의 말레이시아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는 중국인을 길러준 땅”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영국은 말레이반도의 ‘상상된 공동체’로서 말라야를 언급했지만, 페낭 디아스포라는 말라야를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화인을 ‘받아주고 품어준 나라’로 여겼다는 의미이다.

우롄테는 1904년 말 1년여간의 연구원 생활을 청산하고 페낭으로 귀향했다. 영국인 의사의 병원을 인수해 자기 병원을 개업했다. 환자는 많고 병원은 부족하던 시절, 마차를 타고 왕진을 다니며 일요일도 쉬지 않고 밤늦도록 진료했다. 그 와중에도 페낭 화인사회를 개혁하는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고 여성 교육 확대, 변발 폐지, 도박과 아편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우의 병원은 번성했고, 림분켕의 처제를 아내로 맞기도 했다. 하지만 두 번째 귀향도 오래가지 못했다. 우롄테에게 예고된 세 번째 이향의 빌미는 아편이었다.

세 번째 귀향: 베이징-페낭

영국이 말레이반도를 식민지배할 수 있었던 동력은 페낭을 중심으로 한 화인 네트워크에 있었다. ‘교역하는 디아스포라’라 불린 페낭 화인권의 원천은 아편이었다. 영국은 페낭의 화인사회에 아편 전매권을 주고, 화인 엘리트는 동족 노동자에게 아편을 팔아 부를 축적했다. 제국주의의 각축이 본격화한 19세기 후반부터 영국은 화인 엘리트에 의한 대리통치가 아닌 영국 자본의 직할 지배로 전략을 바꿨다. 1906년 5월 영국 하원은 인도-중국 간 아편 무역이 비도덕적이라며 즉각적인 아편 무역 중단을 행정부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영국 하원과 식민 정부인 해협식민지 당국의 입장은 달랐다. 아편 무역을 통한 수입으로 근근이 행정비용을 충당해온 해협식민지 당국은 아편 무역 중단을 용납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인사회에 불붙기 시작한 아편 반대운동을 반정부활동으로 규정하며 강경 대응했다. 의학적·사회적으로 아편을 용납할 수 없었던 27살의 의사 우롄테 역시 아편 반대운동에 팔을 걷어붙였다. 그는 페낭 디아스포라와 협력해 1906년 3월 말레이시아 이포에서 화인 3천 명이 참가한 ‘해협식민지-말레이국연방 아편 반대대회’를 조직했다. 이듬해 페낭에서는 아편 반대 화인단체 ‘계연사’(戒煙社)도 결성하고 2차 아편 반대대회를 페낭에서 열기로 했다. 페낭의 화인사회는 발칵 뒤집혔고, 식민당국과 아편 거상들은 반란 주동자로 우롄테를 지목했다. 페낭 의료 당국자가 경찰을 대동하고 우의 병원에 들이닥쳐 소량의 치료용 아편을 찾아내 유해약물 금지령 위반으로 그를 기소했다. 벌금형을 받은 그의 이야기는 국제적 뉴스가 됐다.

청나라 말기 근대식 군대인 신군 군의관 시절의 우롄테. 동북지방의 폐페스트와 싸우던 1911년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스

청나라 말기 근대식 군대인 신군 군의관 시절의 우롄테. 동북지방의 폐페스트와 싸우던 1911년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스

페낭 디아스포라의 굴곡진 삶

이 무렵 우에게 청나라 직례총독이자 북양대신이던 위안스카이가 톈진의 육군군의학교 교감 자리를 제안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화인사회의 배척을 받으며 고향 페낭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중국 의료 발전에 기여할 것인가. 그는 결국 상하이로 향하는 증기선에 올랐다. 1908년부터 29년간 중국에서 역병을 퇴치하고 의료 선진화를 지휘하며 존경받던 그가 귀향을 단행한 것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이었다. 세 번째 귀향의 동기는 모호하다. 전쟁을 피해서라거나, 중국 의료 개혁의 전망이 보이지 않아서일 거란 추정이 있지만 무엇보다 29년간의 중국 생활이 페낭인 우롄테에겐 ‘타향살이’였기 때문이 아닐까. 당시 말라야의 정세는 페낭 디아스포라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말레이인의 말라야’라는 말레이 민족주의가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지 재편 구상과 맞물려 득세하면서, 우롄테와 화인을 ‘길러준 땅’은 그들을 배척하려 했다. 그런데도 환갑을 앞둔 우롄테는 귀향을 택했다. 핏줄보다 고향이었던 것일까. 우롄테의 세 번의 귀향은 오늘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의 굴곡진 삶을 그대로 드러낸다.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장

*<키워드 동남아> <도시로 보는 동남아시아> 등을 펴낸 서강대 동아연구소가 새겨볼 인물을 키워드로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현재를 살펴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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