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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외교의 힘은 어디에서 출발했을까?

인도네시아의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외교전략을 제시한 초대 부통령 모하맛 하타
등록 2023-05-12 12:38 수정 2023-05-18 02:27
1950년 부통령으로 재직할 때의 모하맛 하타. 위키미디어 코먼스

1950년 부통령으로 재직할 때의 모하맛 하타.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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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전, 인도네시아(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 식민지 주민들 앞에 상반된 특징을 가진 두 남자가 홀연히 나타났다. 한 명은 때로 즉흥적이지만 특유의 카리스마스적 리더십으로 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받았다. 다른 한 명은 지적이면서 진중한 성격에 특유의 균형감각 있는 결정으로 자신의 역량을 대중에게 선보였다. 정치 세계가 한 편의 연극이라면 이 두 사람 중 대중은 누구를 주인공으로 선택해야 할까? 90년이 지난 2023년 시점에서 돌아보면 당시 선택된 주인공이 과연 적절한 캐스팅(배역 선정)이었을까?

수카르노의 오른편

제2차 세계대전의 끝자락으로 시간을 거슬러 가보자. 일본에 대량의 네이팜탄이 투하된 ‘도쿄 대공습’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번의 원자폭탄 공격은 결국 제국주의 일본을 패망으로 이끌었다. 원폭이 투하된 1945년 8월7일, 일본 남방군 총사령관인 데라우치 히사이치는 당시 인도네시아의 지도자인 수카르노, 모하맛 하타, 라지만 웨디오디닝랏을 베트남 달랏으로 초대해 극진한 대접과 함께 독립을 준비하라는 언질을 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을 요구하는 강렬한 요청이 이어졌고, 수카르노와 하타는 독립선언문을 준비했다. 베트남에서 귀국한 지 사흘이 지난 1945년 8월17일 아침, 수카르노 자택에 시민 5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수카르노와 하타가 연단에 올라섰다. 수카르노의 짧은 연설이 끝나고 독립선언문이 발표된다. “우리 인도네시아 국민은 이로써 인도네시아 독립을 선언합니다. 권력이양에 관한 일 등은 가능한 한 이른 시간에 철저하게 수행됩니다.”

다음날인 8월18일, 독립준비위원회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의 정부조직을 발표하면서 수카르노와 하타를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임명했다. 또한 이슬람 샤리아법 적용 문구가 삭제된 헌법이 발표됐다. 수카르노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순간은 인도네시아공화국 역사에서 가장 빛난 장면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 장면의 중심인물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이후 대통령으로 추대된 수카르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수카르노의 오른편, 아담한 체형에 두꺼운 뿔테를 쓴 사람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카르노가 그이가 도착하기 전에는 독립선언 연설을 시작하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두 명 중 한 사람, 샤리아법에 따른 통치가 아닌 세속국가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시킨 당사자인 모하맛 하타(Mohammad Hatta)다.

미낭카바우족의 청년 독립투사가 되다

하타는 1902년 8월12일 부키팅기, 과거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의 포르트데콕에 자리한 독실한 이슬람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부유한 외갓집 덕분에 풍요로운 어린시절을 지냈다. 부키팅기에 있는 말레이 학교를 제외하면 줄곧 네덜란드계 학교에 다닌 하타는 이후 네덜란드의 에라스뮈스대학 경제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에 진학했지만 결국 학위를 마치지는 못했다. 네덜란드 유학 중 그의 인생에 큰 변곡점이 생겼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어 약자로 뻬이(PI·Perhimpoenan Indonesia, 인도네시아인협회)는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조직한 국외단체다. 반식민주의·민족주의·반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뻬이에서 하타는 1925년부터 1930년까지 의장직을 수행하면서 인도네시아의 독립과 반제국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뻬이의 활동은 네덜란드 정부의 이목을 끌었고, 결국 협회의 수장인 하타와 주요 간부가 체포됐다. 재판 당시 하타는 인도네시아 국민에게 가해진 식민세력의 억압과 약탈을 고발하고 식민지로부터 해방을 촉구하는 변론을 통해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자로 큰 명성을 얻었다.

하타는 1932년 7월 인도네시아로 돌아온다. 하타를 비롯한 네덜란드 유학파 민족주의자들은 ‘인도네시아 민족교육당’(PNI-Baru)에 입당한다. 이들은 인재를 양성해 식민세력에 장기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독립운동의 주요 노선으로 제시했다. 이에 반해 본국에서 명성을 얻던 수카르노는 혁명을 통한 직접적인 행동을 강조했고, 그는 출소 뒤 인도네시아당(Partindo)에 입당한다. 수카르노와 하타의 활동은 총독부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고, 결국 그들은 식민당국에 의해 자바섬을 떠나 외곽 섬에 억류된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2년 3월 자바 해전의 승리로 인도네시아를 점령했고, 억류된 하타와 수카르노는 네덜란드로부터 해방을 이끌어준 일본에 호의적 감정을 가졌다. 이들은 일본의 강제동원과 물자 약탈에 저항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당시 하타와 수카르노를 비롯한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일본과 협력해, 궁극적으로 네덜란드로부터 인도네시아 독립을 이루려 했다.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는 수카르노(가운데)와 모하맛 하타(오른쪽). 위키미디어 코먼스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는 수카르노(가운데)와 모하맛 하타(오른쪽). 위키미디어 코먼스

수마트라 출신의 유능한 전략가

네덜란드와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 하타와 수카르노는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급 인사로 협력과 경쟁을 통해 대중에게 자신들을 알렸다. 자바인과 미낭카바우인, 자바 출신과 수마트라 출신,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있는 지도자와 학식과 덕망을 지닌 지도자라는 상반된 특성이 있었고, 대중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둘의 활동을 비교했다.

독립선언이라 하기에는 아주 짧은 단 두 문장으로 340년여 네덜란드 식민지와 3년여 일본 식민지는 그렇게 끝을 향해 갔다. 자바, 수마트라, 보르네오, 술라웨시, 말루쿠 및 소순다 열도까지 영토가 확정됨으로써 신생독립국인 인도네시아공화국이 시작됐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난리에서 벗어난 네덜란드는 호시탐탐 식민지 영토의 복원을 원했다. 결국 네덜란드는 공화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채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과거 식민 영토의 재복원을 추진했다. 수많은 국민이 희생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1945년 8월~1949년 12월) 끝에 인도네시아는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하타와 수카르노는 상반된 배경에서 비롯된 지지층의 열망을 충족하면서 독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협력했다. 특히 자바섬과 함께 넓은 영토와 인구를 가진 수마트라섬은 지역 출신인 하타에 대한 믿음과 지지의 일환으로 공화국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하타가 정부의 주요 직책에 있지 않았다면 이슬람 세력과 수마트라 주민의 지원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네덜란드로부터 영토와 주권을 완전히 이양받은 1950년부터 1957년까지 인도네시아는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해 국가 운영을 위한 다양한 정치를 시험했다. 하타는 당시 식민지 유산으로 남겨진 관료주의 개혁과 여러 정치세력 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헌법 개정에 이바지했다. 또한 자바 이외의 외곽 섬들을 하나의 공화국으로 통합하기 위해 지난한 정치 협상을 시도해 큰 유혈 사태 없이 외곽 섬들의 통합을 이끌어냈다.

수카르노와 결별, 위대한 유산은 남아

의회 권한을 강화해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실현하려던 하타의 노력에도 1950년대 중반부터 수카르노는 독재 성향을 드러내며 권위주의 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실질적 권한 약화와 정치적 갈등으로 하타는 1955년 12월 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정치적 견제가 없어지자 수카르노는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헌법 체계인 ‘교도민주주의’를 제시했다. 의회를 해산하고 최고 입법기관인 임시국민자문회의(MPRS)를 설치해 독재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권위주의 체제를 구현하려는 수카르노의 정치적 행위에 하타는 공개적으로 여러 비판을 했다. 의회주의자인 하타는 수카르노와 군부가 추진한 교도민주주의가 중앙집권적 권력 행위가 아닌 독재체제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수카르노는 하타의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국내의 정치 상황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주력했다.

수카르노의 교도민주주의 시기와 수하르토의 신질서 시대에 하타는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고, 결국 그는 1980년 3월14일 77살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신생독립국의 부통령, 총리, 국방장관, 외무장관을 역임하면서 사회 혼란상이 가중된 인도네시아의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키팅기에 자리한 하타의 생가는 현재 ‘생가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정정훈 제공

부키팅기에 자리한 하타의 생가는 현재 ‘생가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정정훈 제공

하타의 여러 정치 활동에서 현재까지 주요 업적으로 평가받는 부분은 그가 내세운 인도네시아의 외교전략이다. 그는 특정 시기에 특정 이슈에 따라 강대국과 동조하고 협력할 필요는 있지만, 이들과 군사·경제를 포함해 어떤 부문에서도 장기 협정을 맺어 자주성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외교 노선’(Free & Active Policy Doctrine)을 내세운다. 하타의 외교전략은 1948년 ‘두 바위의 대결’이라는 연설과 1953년 ‘인도네시아의 외교정책’이라는 기고문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미국과 소련으로 분리된 세계에서 인도네시아는 한 진영에 치우치지 않되 중립 노선도 아닌 독립적 외교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또한 국제외교에서 평화를 지키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인도네시아가 적극적 외교를 펼쳐나가야 함을 강조한다.

하타가 제시한 외교 지침은 여전히 인도네시아가 외교 현안을 다루고 결정하는 데 주요한 기준으로 활용된다. 러시아의 침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2022년 6월 전격적으로 양국을 방문해, 전쟁 중단을 위한 적극적인 외교를 시도했다. 또한 장기화한 미얀마 쿠데타에 대해서도 여러 조처를 하고 있다. 특히 폭력과 학살에 노출된 시민의 안전 보장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대책을 촉구하면서 다른 아세안 국가와 달리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치라는 연극 무대에서 하타는 주인공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연극의 조연으로서 그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인도네시아인의 가슴에 무겁게 남아 있다.

정정훈 서강대 동아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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