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지지 마라>는 호세 리살에게 필리핀의 국민영웅, 민족주의운동의 상징, 아시아 최초의 민족주의자, 첫 번째 필리피노 등의 수식어를 안긴 소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리살을 사형으로 이끈 작품이기도 했다. 속편 <폭로자>와 함께 리살이 쓴 두 편의 소설은 필리핀 교육과정에 포함되도록 법으로 제정됐을 정도로 국가로서의 필리핀과 민족으로서의 필리피노를 상징하는 근본이다.
리살이 두 소설에서 드러내려 한 것은 16세기 이후 수백 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받으며 축적된 착취와 차별의 구조였다. 부활한 예수가 다가오는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마라”고 한 성경의 요한복음 한 구절을 제목으로 정한 것도 이 구절이 스페인을 비롯한 서구에서는 ‘닿으면 옮긴다’는 맥락에서 종양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본업이 안과의사이던 리살이 환자의 종양을 드러내고 처방하듯, 조국의 종양을 드러내 보이겠다는 의지를 <나를 만지지 마라>의 헌사에서도 분명히 드러낸다. 리살이 그토록 드러내려 했던 식민지 필리핀의 ‘종양’은 무엇이었을까.
1565년 레가스피의 함대가 루손섬의 마닐라를 점령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스페인의 필리핀 통치는 1898년 미국으로 그 통치권이 넘어가기까지 300년이 넘는 기간 이어졌다. 스페인이 필리핀에 진출한 핵심 목적은 흔히 ‘3G’로 정리된다. 바로 왕의 영광(Glory), 신의 복음(Gospel), 경제적 이득(Gold)이다. 이 세 요소는 상호 연결됐는데, 핵심은 식민지에 가톨릭을 전파해 이를 매개로 경제적 이득을 취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우선 ‘바랑가이’라 부르던 촌락 중심의 필리핀 현지사회를 ‘알카디아’와 ‘푸에블로’라는 행정단위로 재편하고, 더 낮은 단위인 푸에블로는 교회와 교회를 이끄는 신부와 수도사들이 관리하고 운영했다. 그 과정에서 마닐라를 중심으로 가톨릭이 광범하게 전파됐고, 지역사회는 스페인에서 파견된 신부와 수도사 중심 교회 세력이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면서 현지인을 관리·착취하는 구조로 변질됐다. 리살이 드러내려 한 것도 수백 년 동안 부를 독점하면서, 신의 말씀을 따르는 충실한 복음의 전파자가 아닌 현지인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지주로 변질된 ‘교회와 신부’라는 이름의 사회적 종양이었다.
식민시기 지배세력에 대한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산발적 저항에 그쳤다. 그러다 19세기 이후 기존 스페인의 식민지이던 남미의 멕시코를 비롯한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지 착취 구조가 극적으로 변화한다. 즉, 남미와의 무역을 버리고 ‘아시엔다’라고 부르는 대농장 경영을 통한 상품작물(설탕, 아바카, 담배, 코코넛 등)의 대량 재배 중심 구조로 전환된 것이다.
대농장의 임차인 또는 소유주는 무역을 위해 정착한 중국계와 현지인 사이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많았다. 그들은 자기 자녀를 잘 교육하기 위해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으로의 유학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지식계층으로 성장한 2·3세대 후예를 ‘일루스트라도’라 칭한다. 이들이야말로 계몽지식인이자 필리핀 민족주의운동의 주력이었다. 리살 역시 중국계 메스티소의 후예로 스페인에서 유학한 대표적 계몽지식인이었다.
1861년 6월19일 루손섬의 라구나주 칼람바의 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호세 리살이 11살이 되던 때, 1872년 2월 필리핀계 신부 세 명이 카비테에서 일어난 폭동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사형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사형당한 이 중 한 명인 부르고스 신부의 제자이던 리살의 형이 집으로 도망쳐 왔다. 리살은 그로부터 식민지 필리핀의 현실과 모순 등을 인식한다. 그 전인 1871년 어머니가 억울하게 범죄 혐의를 받고 감옥에 2년 동안 갇힌 것도 리살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리살은 언어와 글쓰기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1879년에는 문학 경시대회에서 시로 입상해 명성을 떨쳤다. 필리핀의 피식민 학생이 스페인어로 스페인 학생들과 경쟁해 입상한 것만으로 그는 전국적으로 주목받았다. ‘필리핀 청년들에게’라는 제목의 시에서 리살은 필리핀 청년세대를 “내 조국의 아름다운 희망”이라고 칭해, 이미 10대에 ‘필리핀인’이라는 분리된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냈다. 리살은 글쓰기만이 아니라 안과의사로서도 역량이 뛰어났다. 어머니의 실명을 계기로 필리핀 산토토마스대학 재학 중 법학에서 안과로 전과한 그는, 1882년 5월 스페인에 건너가 1884년 마드리드대학에서 의학 학위를 받는다.
리살이 스페인 , 영국 , 프랑스 , 독일 등 유럽 주요국을 다니면서 의사로 활동하는 중에 1887년 2월 완성한 <나를 만지지 마라>는 그의 글쓰기 재능과 유럽 주요국을 다니며 근대문명을 접하면서 형성된 ‘필리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결합한 소설이다. 수백 년 이어진 스페인 식민통치는 거주민 대부분을 가톨릭화했을 뿐 아니라 그 착취적 통치와 사회구조적 모순에 적응·체념하게 했다. 현지의 ‘인디오’라 불리던 필리핀의 피식민 주민들은 루손섬, 비자야군도, 민다나오섬으로 나뉘어 있었다.
리살은 식민지가 가진 모순과 교회·신부들에 의한 착취의 부당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현실에 안주하는 동포들의 모습에 절망과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 분노와 동정의 감정은 리살에게 스페인령 필리핀이 아닌, 필리핀 자체의 언어·문화·역사에 관심을 갖게 했고, 더 나아가 풍자적 소설로 식민지적 착취 구조를 드러내 조국 동포에게는 계몽을, 스페인인에게는 자성을 촉구하려 했다.
<나를 만지지 마라> 출간 뒤 리살의 삶은 극적으로 변화한다. 이 소설의 위험성을 직감한 스페인 식민당국은 이를 금서로 지정하고 경계한다. 반면 흩어져 있던 민족주의 관련 활동가들은 리살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리살을 민족주의운동의 상징으로 여기며 연대한다. 리살은 그를 아끼는 유럽의 지식인들과 가족이 만류했음에도 1887년 8월 필리핀으로 돌아온다.
리살은 필리핀에서 가장 앞선 장비와 기술을 가진 의료인으로 명성을 떨친다. 그에게 의학은 여전히 착취와 차별의 구조에서 전근대적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동포들을 계몽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리살은 고통받는 농노를 위한 활동을 이어가다 1892년 ‘라 리가 필리피나’(필리핀 연맹)를 결성했다. 리살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연맹의 회원이던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비밀혁명그룹 ‘카티푸난’을 설립한 것도 같은 해였다. 한 해 전인 1891년에는 리살의 두 번째 소설이자 <나를 만지지 마라>의 연작인 <폭로자>가 벨기에에서 출간됐다.
온건하고 평화적인 방식을 선호한 리살과 달리, 보니파시오의 카티푸난은 급진적이면서 정국을 뒤흔드는 방식의 저항을 선택했다. 필리핀 연맹은 금방 스페인 당국에 강제 해산돼, 리살은 남부 민다나오섬으로 유배된다. 카티푸난은 비밀리에 리살을 대통령이자 저항의 상징으로 삼아 각지에서 봉기 방식으로 혁명을 준비했다. 1896년 8월 카티푸난은 그들이 주도한 필리핀 혁명 직전 리살을 마닐라에서 구출하려 했으나, 리살은 거절했다. 리살이 끝까지 무장을 통한 봉기와 저항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혁명 열풍이 전국으로 번지는 와중인 1896년 12월30일, 리살은 결국 사형당한다. 리살의 비극적 죽음은 그의 진가와 상징성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리살의 사형 소식은 필리핀 전국을 뒤흔들었고 혁명은 더욱 격렬해졌다. 이는 그대로 1898년 6월12일 카티푸난을 장악한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필리핀 독립과 공화국 성립 선언으로 이어진다. 필리핀인이 지금까지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선언이다.
리살이 사랑한 조국의 운명은 공화국 선언과 관계없이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넘어갔지만, 그의 소설과 정신을 추종한 이들의 활동은 미국의 대필리핀 식민정책 기조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리살이 형장에 끌려가기 전날 지은 절명시 ‘나의 마지막 작별’을 통해 당시 미국 하원의원 헨리 쿠퍼를 비롯한 미국 지식인들은 필리핀인이 단순히 부족 단위의 미개한 문명을 지닌 계몽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호세 리살과 같은 문호를 배출한 ‘민족’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이 영향은 1900년대 이후 실시된 이른바 ‘쿠퍼법’이라는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유화적 동화정책으로 이어졌다.
리살은 타고르와 같은 해, 쑨원보다 5년 전, 간디보다 8년 전에 태어났고, 가장 먼저 민족주의운동 혐의로 제국에 희생당했다. 그가 아시아 최초의 민족주의자, 첫 필리피노라 불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35년의 짧지만 불꽃같은 삶은 동남아시아뿐 아니라 아시아 곳곳에 씨를 뿌려 각지의 민족주의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19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그의 죽음은 수카르노, 호찌민, 아웅산 등과 같은 20세기 동남아시아 민족주의를 주도한 인물들의 탄생을 예고했다.
김종호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i>동남아시아</i>학 협동과정 교수
*<키워드 동남아> <도시로 보는 동남아시아사> 등을 펴낸 서강대 동아연구소가 새겨볼 인물을 키워드로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현재를 살펴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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