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흐른다”고들 한다. 물길처럼 발원해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유유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식민지 해방과 국가 만들기가 이어진 인도네시아 현대사는 거대한 강과 같은 한 편의 대하드라마다. 인도네시아의 국부 수카르노(1901~1970)가 그 주인공이다.
“수카르노의 허세와 매력, 권모술수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성은 관찰자들을 경탄하게 하거나 혹은 분노하게 했다. 인도네시아인들도 수카르노 숭배와 적대로 갈렸지만, 단언컨대 수카르노에 무관심한 인도네시아인은 아무도 없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역사학자 J.D. 레그(1921 ~2016)는 <수카르노 평전>(1972)에서 이렇게 썼다. 수카르노 사후 2년 만에 출간한 이 책을 네 차례나 개정했어도, 수카르노가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의 중심인물이며, 통합된 인도네시아의 비전을 제시하고 독립을 위한 투쟁과 공화국 초기에 인도네시아의 중요한 상징”이란 애초의 평가는 바꾸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현대사에서 수카르노는 하나의 정치 흐름이었고, 그의 리더십 자체가 하나의 장르였다는 말이다.
수카르노는 1901년 동부 자바 수라바야에서 태어났다. 수카르노가 구술한 <자서전>(1965)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토착 지배계급 프리야이(Priyayi)로 자바 전통과 접목한 이슬람교도였고, 어머니는 발리 귀족 출신의 힌두교도였다. 당시 관행에 비춰 자바 이슬람교도와 발리 힌두교도의 혼인은 이례적이다.
소년 수카르노는 책벌레에 가까웠다. 그는 네덜란드어·독일어·프랑스어·영어에 능통했고, 서구의 사상과 사조에도 밝았다. 하지만 서구문화에만 빠져 있지는 않았다. 자바어를 쓰는 초등교육을 받던 무렵 수카르노는 와양(Wayang) 인형극을 통해 자바의 전통과 영웅 서사를 익혔다. 훗날 수카르노가 대중 연설에서 와양의 영웅 이야기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었던 이유다. 1920년 그는 네덜란드가 자바에 설립한 고등교육기관인 반둥기술대학에 입학해 토목과 건축을 공부했다.
수카르노의 청년기는 그를 둘러싼 세상의 흐름이 크게 변하던 시기였다. 식민통치를 본격화한 지 100년 만에, 네덜란드의 식민정책은 ‘윤리정책’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인도네시아의 전 영역을 정복한 네덜란드는 토착민의 교육 기회를 확대하고 복지와 권익도 챙기겠다고 했다. 물론 네덜란드의 속셈은 광활한 식민지 지배를 위해 피식민지 엘리트를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교육 기회가 확대되고 정치 공간이 열림에 따라 인도네시아에서는 서구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와 전통적 이슬람 지도층이 각성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이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네덜란드가 의도치 않은 식민지 해방의 흐름이 생겨났다. 이 시기에 ‘인도네시아’란 이름과 개념이 발명됐다. 수카르노가 수라바야의 고등학교(HBS) 유학 시절 이슬람 민족주의운동 지도자인 초크로아미노토의 집에 기숙한 것은 행운이었다. 이때 그는 초크로아미노토의 집을 드나들던 선배 선각자들을 대면하고 그들과 토론할 수 있었다. 선배 선각자들이 만들어낸 저마다의 민족주의 지류를 살필 수 있었다.
1926년 기고문에서 수카르노는 민족주의와 마르크시즘, 이슬람 사이에 이익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수카르노의 이 메시지는 이후 40년간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를 민족주의운동 전체를 대변하는 인물로 만들었다. 이듬해 26살의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운동을 기치로 한 인도네시아국민당(PNI)을 창당했다. 1928년 제2차 청년회의에서 그는 ‘청년의 맹세’(Sumpah Permuda) 선언을 내세워 일약 민족주의의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하나의 조국, 하나의 민족, 하나의 언어’를 천명한 것이다. 마침 네덜란드의 탄압으로 공산주의와 이슬람 운동이 퇴조하면서, PNI를 중심으로 인도네시아인민정치조직연합회(PPPKI)를 결성했다. 인도네시아 민족주의가 합류하며 대하의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1945년 9월19일 자카르타의 메르데카 광장에 20만여 명이 운집했다. 수카르노가 인도네시아공화국 출범을 선포한 지 한 달 만의 일이다. 군중은 성마르고 화나 있었다. 독립은 선포됐지만 바뀐 것은 없었던 탓이다. 여전히 일본군이 현상 유지 중이었고, 네덜란드는 연합군 일원으로 인도네시아 재점령을 노리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대통령 수카르노는 단상에 올라 ‘조용한 해산’을 당부했다. 거짓말처럼 대중은 조용히 흩어졌다. 세상이 두 번 놀랐다. 조용한 해산에 놀라고, 수카르노 연설의 영향력에 또 놀랐다.
수카르노에겐 ‘선동가’란 꼬리표가 늘 따라다닌다. 그는 대중 연설을 인도네시아 국민과의 접점으로 여겼다. 수카르노는 “대국민 연설은 양방향 대화다. 나 자신과 인도네시아 국민, 나의 에고와 나의 또 다른 에고 사이의 대화다. 수카르노란 개인과 수카르노의 국민 사이의 대화인 것이다”라고 했다.(1959년 8월17일 독립기념 대국민연설)
수카르노는 일찍부터 자신이 주인공인 무대를 상상하고, 그것을 세계에서 실행하기 전에 연습하곤 했다. 10대 후반부터 청중을 쥐락펴락한 웅변가이던 수카르노는 PNI 창당 이후 민족주의 세력의 힘을 모으는 데 웅변의 힘을 발휘했다. 그의 투쟁은 탁월한 대중 동원력을 바탕으로 직접 적과 대치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투옥과 추방도 기꺼이 감수했다. 일본군 점령기에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인민과 일본 군정 사이의 중재자로 역할을 다했고, 그 지위를 이용해 인도네시아 독립을 준비할 수 있었다.
수카르노가 대중 연설을 중시한 것은 인도네시아의 국가 만들기 과정에서 예고된 본질적인 곤경에 기인한다. 오늘날 인도네시아는 1만7천여 개의 섬으로 이뤄졌고 인구 2억7500만여 명의 다양한 전통과 문화를 지닌 1300여 종족이 어울려 산다. 저마다 자바인, 암본인, 미낭카바우인, 아체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발명된 국가, 인도네시아의 국민으로 창조하는 일은 여느 신생 독립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과제였다. 여기서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인도네시아 전래의 것과 서구의 사조를 종합하는 과업을 부단히 당부하고 설득한 수카르노의 노력만큼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수카르노에게 1950년대 전반은 ‘복류’(어떤 일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진행됨)의 시기였다. 인도네시아는 1950년대 중반까지 의원내각제와 의회민주주의를 실험했고, 대통령 수카르노는 시쳇말로 ‘바지사장’에 가까웠다. 1949년 신중국 성립 이후 냉전은 격화됐고, 인도네시아 정국은 불안정했다. 기반이 취약한 정당들의 이합집산이 거듭되며 의회민주주의는 제 기능을 못했다.
군부와 공산당이 득세했고, 쫓겨난 외국계 회사들의 경영권을 가로채는 군유화(軍有化)로 군부는 경제력까지 확보했다. 오히려 이기주의와 부패가 만연한 정치권을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경제난에다 지체된 사회혁명에 실망한 노동자와 농민의 지지를 받은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당시 조직 기반과 명확한 강령을 갖춘 거의 유일한 정당으로서 영향력이 커졌다. 독립 이후의 실망감, 자바 중심주의를 우려한 다른 지역의 불만이 커지면서 급기야 수마트라와 술라웨시에서는 분리운동이 벌어졌다.
‘상상의 공동체’ 인도네시아를 ‘현실의 공동체’로 통합하고 종합하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은 수카르노는 명목상 국가 최고지도자로서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국가의 목표를 상실했다고 진단한 수카르노의 1959년 대국민 연설은 비장했다. 그는 “당장 올바른 방향으로 운전대를 확 돌리자”고 외쳤다. 그 운전대는 대통령 수카르노가 잡겠다고 했다. 이렇게 수카르노는 ‘대통령 독재’ 혹은 ‘대통령 전제’라는 비난의 표적이 된 ‘교도(敎導)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
수카르노는 1959년 ‘혁명의 재발견’을 강조하면서 1945년의 ‘혁명 헌법’을 부활해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되돌렸다. 대통령이 된 지 14년 만에 처음으로 수카르노는 바지사장이 아니라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며 그 책임까지 떠맡는 국정 최고경영자가 됐다. 그는 대의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자본주의를 부정했다. 1955년 수카르노는 반둥회의(아시아·아프리카 회의)를 열고 냉전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비동맹’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제시한 바 있다. 수카르노의 교도 민주주의는 ‘혁명의 재발견’이란 이름으로 인도네시아 정치·경제·외교에 ‘제3의 흐름’을 제안한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수카르노에게 던져진 질문은 ‘어떻게’였다. 수카르노는 연설로 동원할 수 있는 국민 말고는 따로 독자적 조직에 의존하지 않았고, 혁명을 하자면서 이행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런 수카르노에게 “덩치만 크고 미성숙한 청소년 국가의 태만한 아버지”(윌러드 A. 해나)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1967년, 인도네시아는 수카르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으로 ‘혁명의 재발견’을 폐기했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32년간 수하르토의 반공과 개발독재로 치달았다.
가택에 연금된 상태로는 수카르노가 20년 넘게 해마다 해온 8월17일 독립기념 대국민 연설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고질적인 신부전을 앓았지만 수술을 거부하고 중국인 침술사의 도움에 의존했다. 칼을 멀리하라는 주술사의 말을 좇은 수카르노는 1970년 고전 비극의 주인공 같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수하르토의 32년 독재가 끝나고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된 뒤, 인도네시아 5대 대통령(재임 2001~2004)을 지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1947~)는 수카르노가 세 번째 부인 파트마와티(1923~1980)에게서 얻은 딸이다. 독립혁명 와중에 얻은 딸 메가와티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구름의 여신’을, 수카르노푸트리는 인도네시아어로 ‘수카르노의 딸’을 가리킨다. ‘구름을 머금은 수카르노의 딸’이 된다. 인도네시아 집권여당인 민주항쟁당의 총재이기도 했던 메가와티의 구름은 어떤 흐름을 품고 있을까?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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