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식민지가 해체되고 냉전의 차가움과 내셔널리즘의 뜨거움이 교차하던 시대, 1965년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독립한 싱가포르의 엘리트들이 맞이한 현실은 혹독했다. 평균나이 40대에 불과하던 그들은 서울보다 조금 더 큰 섬에서 200만 명도 되지 않는 인구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그 인구는 중국계·인도계·말레이계 등이 섞였고 언어와 종교, 관습이 제각각이라 하나의 민족이라 볼 수도 없었다. 양옆에는 이슬람 대국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으르렁대고 있었고, 세계적으로는 미소 냉전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아무런 자원도 없던 그들에게서 21세기 아시아에서 가장 잘사는 국가, 관광 대국, 금융 허브, 아세안의 리더, 미-중 관계 조정자 등과 같은 미래를 예측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20세기 후반 싱가포르라는 ‘국가’를 만들어낸 핵심 인물로 정치의 리콴유, 경제의 고켕스위, 외교의 라자라트남 이 세 명이 꼽힌다. 이른바 싱가포르 건국 1세대다. 모두 영국 식민시기에 싱가포르에서 성장했고 영국에서 유학한 엘리트다. 싱가포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싱가포르 내정에 한해서는 리콴유가 아닌 고켕스위를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저개발 지역에서의 국민 소득 추산법–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1956년 고켕스위가 영국 런던정경대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 제목이다. 당시 식민 상태에서 갓 벗어나 공동체를 경영하기 시작한 아시아 지역 관료와 엘리트 지식계층의 지상 과제는 ‘국가 만들기’(Nation Building)였다. 어떻게 영역을 설정하고 지킬지, 그 영역 속에 산업 비중을 어떻게 둘지, 공업화는 어떻게 달성할지,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을 어떻게 ‘국민’으로 탈바꿈할지, 어떻게 그들을 교육하고 일하도록 할지, 세금은 어떻게 빠짐없이 거둘지 등등 유럽이 수백 년 동안 고민하고 피 흘리며 체화한 근대의 이념과 제도를 짧은 기간에, 그것도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국 공동체에 적용해야만 했다.
고켕스위는 싱가포르 독립 이전부터 이를 고민했고, 독립 이후에는 이를 실천했다. 리콴유가 가장 신임하는 정치인이자 관료로서 싱가포르 경제, 국방, 교육의 설계자라 불리며 싱가포르인의 존경을 받았다. 그가 설계한 싱가포르의 뼈대는 지금 개발도상국 후발주자에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과 함께 가장 중요한 참고 모델일 것이다.
1918년 10월6일, 영국 식민시기 말레이시아 믈라카의 유복한 화인가정(중국인 가정)에서 태어난 고켕스위는 2살 때 싱가포르로 이주한 뒤 평생 싱가포르인으로 살았다. 영국 식민시기 싱가포르 최고 교육기관인 래플스칼리지를 졸업한 뒤 공무원이 된 고켕스위는 1948년 능력을 인정받아 장학금을 받고 런던정경대에 입학해 1956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싱가포르가 영국으로부터 자치를 허용받으면서 실시한 1959년 총선거에서 리콴유가 이끄는 인민행동당의 후보로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이 처음 정권을 잡았고, 리콴유와 영국에서 함께 공부하며 창당을 결의했던 고켕스위 역시 당선됐다. 이후 1984년 정치에서 은퇴할 때까지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싱가포르 의회의 의원이자 관료로서 싱가포르 발전에 지대하게 공헌한다.
1959년 당선과 함께 재무부 장관에 임명된 고켕스위가 가장 먼저 손댄 과제는 바로 경제구조 변화였다. 당시 싱가포르 엘리트들은 싱가포르의 상징인 무역과 금융 중심 경제구조를 개선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핵심은 높은 실업률인데, 무역과 금융업은 고용 창출 효과가 큰 산업이 아니었다. 마침 유엔 산업조사 사절단이 싱가포르 경제를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를 1961년 특별보고서로 제출했고, 이를 바탕으로 재무부 장관이던 고켕스위가 1961~1965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해 의회에서 통과시킨다. 그 핵심은 많은 노동력을 수용하기 위해 노동집약적인 제조업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시작으로 1961년 8월 경제개발청을 설립함과 동시에 1962년에는 싱가포르섬 서남부의 거대 늪지대인 주롱 지역을 개간해 기계·화학 기반 대규모 공업단지를 조성했다. 주롱공업단지는 싱가포르 제조업의 핵심으로 지금까지 세계 최고 수준 전자·전기, 화학, 바이오 메디컬 산업의 중심지다.
주롱공업단지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싱가포르 경제구조 개선의 핵심은 산업구조에서 제조업 기반을 늘린다는 것이었고, 실제 1980년부터는 제조업 비중이 무역을 넘어섰다. 지금까지 싱가포르는 전체 산업구조에서 제조업 비중이 최소 20%를 넘도록 한다. 지난 3년간의 코로나19발 봉쇄 조치로 무역과 관광 수입이 현저히 줄어든 싱가포르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제조업 기반의 경제구조 덕분이었다. 1965년 갑작스러운 독립으로 말레이시아라는 배후지를 잃어버린 싱가포르로서는 제조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공업화를 시작한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야말로 생존을 위한 신의 한 수였다.
1965년 8월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축출되다시피 독립한 이후 고켕스위는 재정부 장관직을 잠시 내려놓고 싱가포르의 초대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국방부 장관으로서 고켕스위에게 주어진 과제는 채 200만도 되지 않는 인구와 냉전 환경, 주변국의 군사적 대립이라는 안보 위기 상황에서 고작 2개 보병대대만으로 국경을 확립하고 영토를 무력으로 보전할 기반을 쌓는 것이었다. 사실 식민의 유산이자 냉전의 영향으로 싱가포르에는 영국군이 주둔했고, 싱가포르 일반 대중 역시 피식민의 관성이 여전히 남아 국방과 안보는 영국군에 유지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고켕스위의 생각은 달랐다.
“오늘날 영국군의 보호가 우리 시민들을 우리 자체 국방 대비 필요성에 안일하게 접근하도록 했다. 이들은 (영국군의) 보호가 영원할 것이라고 여긴다. 나는 이런 추정에 기대어 우리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생각한다. 어느 누구도, 우리뿐 아니라 심지어 영국마저도 이것(영국군의 주둔)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말할 수 없다.”
그의 우려는 적중해 1967년 영국이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싱가포르의 안보뿐 아니라 경제적 안정성에 대해서도 세계 시장이 의문을 품도록 했다. 고켕스위는 1965년에서 1967년까지, 그리고 1970년에서 1979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시기에 이런 인식에 기반해 싱가포르군(SAF, Singapore Armed Forces)을 대대적으로 조직했고, 18살 이상 남성은 무조건 군대에 복무해야 한다는 국민개병제로 국방의 기초를 닦았다. 지금도 싱가포르는 전세계에서 몇 없는 징병제 실시 국가 가운데 하나다. 이는 경제적 부유함, 외교적 균형 전략과 함께 싱가포르를 강소국으로 칭하는 주요 기반이다. 또한 고켕스위는 징병제를 인종과 종교적 배경에 상관없이 실시함으로써 국가 성립에 필수적인 공동체의식 형성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지난 싱가포르 교육 시스템에서) 초등학교 자동 진학은 1975년까지, 중등학교 자동 진학은 1977년까지 실시됐다. 이는 배움이 느린 학생들이 더 높은 수준의 학급으로 진학함으로써 (그곳에서) 배우게 되는 것을 갈수록 이해하지 못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다른 학습 능력을 가진 학생들을 다른 수준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보고서는 둔재, 평균, 평균 이상, 상위 학습자에 맞춘 능력별 학급 편성을 제안하고 있다.”
1979년 국방부를 떠난 고켕스위가 담당한 분야는 교육이었다. 싱가포르가 대학 진학 이전 중등교육까지 의무교육을 함에도, 내부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고급 인재를 걸러내도록 한 교육 시스템은 한편으로는 극단적 엘리트주의라는 비판을, 다른 한편으로는 강소국 싱가포르의 근간을 제공했다는 칭송을 동시에 받지만, 그 평가와는 별개로 엘리트 생산을 지상 과제로 설정한 자원 없는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대 초반 고켕스위를 만난 이래 반세기 동안 싱가포르의 굴곡진 역사를 함께 주도한 평생의 동반자 리콴유는 2010년 5월14일 향년 91로 숨진 고켕스위의 국가 장례식에서 그와의 험난했던 싱가포르 국가 만들기 프로젝트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나와 함께한 내각의 동지들 가운데 싱가포르의 결과에 가장 위대한 변화를 만들어낸 이는 고켕스위였다. 나는 그에게 정부에서 가장 힘든 일만 맡겼다. 1959년에서 1965년까지 경제적 생존이 중대한 문제일 때 재무부를 맡겼고, 1965년 독립할 당시 군대라고는 보병 2개 대대밖에 없었을 때 그에게 국방부를 맡겼다. 1967년 영국군 철수 선언 당시에는 국가총생산의 20%를 차지하던 영국군 주둔 비용을 해결하라고 다시 재무부를 맡겼다. 그 문제가 해결된 이후인 1970년에는 다시 국방부를 맡겼다. 그에게 교육부를 맡겼을 당시는 학교 중퇴율이 급증하고 학생들이 글자도 모른 채 떠나는 시기였다.”
고켕스위가 설계한 싱가포르 시스템의 세부는 주변 환경에 따라 다소 변했지만 경제적 생존, 자주국방, 실용적 교육을 추구하던 그의 근본정신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김종호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인물로 본 동남아시아’는 <키워드 동남아> <도시로 보는 동남아시아> 등을 펴낸 서강대 동아연구소가 새겨볼 인물을 키워드로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현재를 살펴보는 칼럼입니다. 동아연구소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아시아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활발히 연구를 지속하는 한편,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와 공동으로 국제학술지 <트랜스>(TRaNS)를 발간합니다. 3주마다 한 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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