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일대기는 모든 근대국가의 국가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민족이라는 상상된 (혹자에 따라서는 계승된) 정체성을 짧은 시간 내에 전파하는 데는 영광스러운 역사를 이끈 영웅의 서사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국권 피탈 직전 을지문덕과 이순신 장군의 전기를 잇달아 저술한 것도, 민중의 민족의식 고취와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한 저항의 발로였다.
그렇다면 동남아 최대 국가인 인도네시아 국민에게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영웅은 누구일까? 유명한 역사적 인물일수록 거리나 기관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인도네시아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단연 가자 마다(?~1364)가 아닐까 한다. 수도 자카르타를 포함한 수라바야, 메단, 덴파사르 등 인도네시아의 거의 모든 주요 도시의 중심가는 그의 이름을 땄다. 어디 그뿐인가? 인도네시아의 유명 대학 가운데 하나이며 현 조코 위도도 대통령(2014년 취임)의 모교 역시 가자마다대학이다. 가자 마다와 조금이라도 연이 닿은 지역에서 저마다 ‘최대 규모로’ 그의 동상을 건립하려는 것만 봐도 가자 마다에 대한 인도네시아인의 존경심을 엿볼 수 있다.
전근대 동남아시아 역사 속에서 활동했던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가자 마다의 출생과 관직 등용 이전의 삶에 대한 정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재 동부 자바의 모조케르토로 비정되는 트로울란을 수도로 한 마자파힛 왕국(1293-1527)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설과, 마자파힛의 전신인 싱하사리 왕국(1222~1292)의 왕족 출신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인할 수 없다.
왕실 근위대장으로 관직을 시작한 가자 마다는 마자파힛 왕국의 개국공신 가운데 한 명이 1321년 반란을 일으키자, 당시 자야느가라 왕과 그의 가족을 수도 트로울란에서 탈출시켰다.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한 가자 마다는 트로울란으로 돌아온 왕의 큰 신임을 얻게 됐고, 7년 뒤 자야느가라 왕이 주치의에게 살해되자 정치적 혼란 과정을 수습하고 선왕의 이복 여동생인 디아 기타르자가 즉위하는 데 공헌해 재상 자리에 올랐다.
재상이 된 가자 마다는 과거 몽골의 침략으로 상실된 싱하사리 왕국의 지역 패권을 되찾을 것을 천명했다. 현재 인도네시아 영토와 거의 일치하는 지역을 일컫는 누산타라 전체를 복속하겠다는 야심으로 영토 확장 계획을 세운 그는, 우선 1343년 발리와 롬복을 점령한 뒤 해군을 서쪽으로 파견해 수마트라 지역의 영향력을 확보했다. 이때부터 가자 마다의 권력은 단순한 재상의 그것을 넘어서게 되는데, 자야느가라 왕의 사촌인 아딧야와르만을 마치 봉건제도하의 제후와 같이 점령한 남부 수마트라 지역의 지도자로 임명한 것이 그 증거다.
가자 마다의 영토 확장은 기타르자 여왕의 아들인 하얌 우룩(재위 1350~1389)의 치세에도 계속됐다. 새 왕의 즉위에도 여전히 재상직을 유지한 그는 이미 기타르자 여왕 시대에 정복했던 싱가포르와 그 아래에 있는 빈탄섬, 그리고 중부 수마트라의 잠비에 더해 전방위적 영토 확장을 이어갔다. 특히 그의 심복이자 해군 총지휘관이던 락사마나 날라의 작전을 통해 말레이반도로부터 수마트라, 칼리만탄, 뉴기니섬의 서부, 심지어 현재 필리핀의 민다나오 남부를 마자파힛의 영역으로 확보했다.
가자 마다의 영토 확장과 하얌 우룩의 안정적 내치로 마자파힛은 명실상부한 동남아시아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특히 주요 무역항과 향신료 산지를 복속함으로써 13세기 말 몽골의 동남아 원정 이후 중국인 상인들이 주도하던 향신료 무역을 장악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이에 해안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국인 상인들은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수가 현지 사회와 동화될 수밖에 없었는데, 대표적 향신료인 정향(클로브)을 일컫는 단어가 중국인 상인들이 사용하던 쳉케(Cengkeh)로 통일된 시기도 이때부터다.
당시 수도인 트로울란은 제국으로 성장한 마자파힛의 번영 그 자체였다. 붉은 벽돌로 지은 화려하고 웅장한 성곽과 해자로 둘러싸인 왕궁은 수많은 왕실경비대가 지켰고, 왕과 왕비의 처소와 집무공간(위타나)은 세상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장엄하면서도 화려했다. 특히 매년 8월 열리는 왕실 축제는 인도, 캄보디아, 중국, 안남(베트남 중부), 참파(베트남 남부), 시암(타이) 등 인근 왕조의 사절단뿐만 아니라 마자파힛의 힌두교 성직자와 불교 승려가 참여하는 당시로서는 전세계의 축제였다.
이러한 하얌 우룩 왕의 치세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가자 마다의 권세 역시 대단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자 마다 비석은 그의 정치적 권위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려주는 대표 증거다. 현재 동부 자바의 말랑에서 발견된 이 비석은 1351년께 싱하사리 왕국의 케르타네가라 왕을 기리는 사원의 건립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비문을 해석한 학자들은 이 비석을 세우도록 명령한 자가 바로 가자 마다라고 추측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가자 마다가 왕과 왕비만이 비석을 건립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던 전통적 자바 국가의 관료와는 차원이 다른 권위를 가졌음을 증명한다.
가자 마다의 절대 권력은 영토 확장 사업이 마무리되고 불과 몇 년 뒤인 1357년에 갑작스레 위기를 맞았다. 당시 서부 자바의 순다 왕국은 마자파힛의 영향력 내에 있었으나, 7세기부터 다져온 저력을 바탕으로 내치에서 독자성을 유지했다. 이에 하얌 우룩 왕은 순다 왕국의 공주 디아 피타로카 치트라레스미와의 혼인으로 돈독한 관계를 맺으려 했고, 강력한 왕국의 지도자를 부마로 삼을 기회라고 생각했던 순다의 링가 부아나 왕은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곧 왕과 공주를 포함한 순다의 왕족과 신료 대부분이 혼인을 위해 트로울란 인근까지 이동했고, 가자 마다는 신료를 대표해 그들을 왕궁으로 안내했다.
그러나 가자 마다는 이 혼인에 대해 당사자들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순다 왕국 손님들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치트라레스미 공주는 마자파힛의 새로운 왕비가 아닌 후궁이 될 것이며, 이는 곧 순다 왕국의 항복과 같은 뜻임을 밝혔다. 가자 마다의 이 발언에 모욕을 느낀 링가 부아나 왕은 혼인을 즉시 취소하고 자신과 함께 온 소수의 병력과 함께 가자 마다 쪽과 전투에 돌입했다. 수적으로 절대 열세이던 순다 쪽 병력은 전멸했고, 지역 설화에 따르면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치트라레스미 공주는 자결하고야 말았다.
마자파힛 왕실과 관료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평소 가자 마다를 견제할 필요를 느꼈던 하얌 우룩 왕을 비롯한 그동안 잠자코 있었던 관료들도 불필요한 살육전을 벌인 가자 마다를 크게 비난했다. 곧 하얌 우룩 왕은 가자 마다에게 동부 자바 해안 지역의 책임자로 강등하는 사실상의 유배형을 내렸다. 순간의 오만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내려온 가자 마다는 결국 1364년 세상을 떠난다. 가자 마다의 실각 뒤 재상이 가지고 있던 책임과 권한은 네 개의 마하만트리(장관)로 분산됐고, 동남아시아 패권을 차지하던 마자파힛도 1389년 하얌 우룩 왕의 사후 내전과 권력다툼으로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다가 1527년 멸망했다.
초라한 말년을 보낸 가자 마다이지만, 놀라운 영토 확장으로 마자파힛의 전성기를 이끈 그는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끊임없이 회자됐다. 동부 자바의 지역 왕국에 불과하던 마자파힛을 불과 수십 년 만에 현대 인도네시아와 맞먹는 영토를 가진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해상제국으로 탈바꿈한 역사의 당사자에 대한 찬사는 곧 신화적 상상력이 가미돼 예술로 승화했다. 사후 백 년이 채 되지 않은 15세기 중엽부터 그는 여러 조각과 전통무용에서 자바와 인도 마하바라다 신화 속 전쟁영웅인 라덴 브라자나타와 비마로 묘사됐다.
20세기 초반 민족주의의 성장은 가자 마다가 종족과 문화를 넘어 인도네시아의 영광을 상징하는 영웅으로 재조명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훗날 독립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수카르노(재임 1945~1967)를 비롯한 청년 민족주의자들은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피지배인을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민족으로 재구성하려 했다. 그들에게 수마트라부터 파푸아까지 마자파힛의 영토로 복속시킨 가자 마다는 위대한 역사를 이룩한 영웅 자체였다. 민족주의자의 가자 마다에 대한 재발견 과정에서 그의 ‘상상된’ 용모가 큰 변화를 겪은 것은 흥미롭다. 전통 예술작품 속에서 우락부락하고 산전수전을 겪은 얼굴로 묘사되던 가자 마다는 곱슬머리와 미남형 얼굴, 그리고 근육질의 몸매를 가진 ‘청년’ 가자 마다로 변신했다.
인도네시아 사회를 주도하는 민족주의 정서를 타고 가자 마다는 민주화 이후에도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24년 임기 만료를 앞둔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역점을 두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새로운 수도 이름이 바로 가자 마다의 정복 대상이던 ‘누산타라’로 정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누산타라의 정복을 달성한 가자 마다를 좇아 인도네시아는 신수도 누산타라를 통해 마자파힛의 위대함을 재현하려 한다.
박정훈 서강대 동아연구소 연구교수*<키워드 동남아> <도시로 보는 동남아시아> 등을 펴낸 서강대 동아연구소가 새겨볼 인물을 키워드로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현재를 살펴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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