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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악의 학살자 , 아시아의 히틀러 , 히틀러와 스탈린에 버금가는 독재자 … . 폴 포트 (1925~1998) 라는 이름에 따라오는 말들이다 . 그는 캄보디아의 급진적 공산주의 크메르루주 (1975~1979) 정권을 이끌며 100만 명 넘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참사 ‘ 킬링필드 ’ 의 원흉이다 .
폴 포트의 본명은 ‘살로트 사르’다 . 폴 포트는 프랑스어의 ‘ 폴리티크 포탕시엘 ’(Politique Potentielle) 의 줄임말로 ‘ 정치적 가능성 ’ 을 뜻한다 . 그는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 대삼촌’ (Grand-Uncle), ‘ 형’ (Elder Brother), ‘ 첫째 형’ (First Brother), ‘87’ 등 여러 가명을 썼다 . 자기 정체를 감춰 국제사회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 많은 가명 뒤에 가려진 진짜 폴 포트의 얼굴은 무엇이었을까 .
캄푸치아 공산당 크메르루주 의 지도자인 폴 포트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 놀 (1913~1985) 정권에 대항하며 수년간 내전을 지속하다가 1975 년 프놈펜을 점령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 최고 권력자로 등극한 폴 포트는 자신이 꿈꾼 ‘ 자급자족적 농업 중심의 유토피아 ’ 를 건설하기 위해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했다 .
폴 포트와 크메르루주가 권력을 장악한 1975 년 4 월부터 권력을 빼앗긴 1979 년 1 월까지 3 년 9 개월 동안 극악무도한 인권침해와 대량학살이 일어났다 . 폴 포트는 프놈펜을 점령하자마자 200 만 명을 농촌 지역의 집단농장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 그 과정에서 수십만 명이 굶어 죽고 병사했다 . 집단농장에서 비인도적인 강제노동을 하다가 또 수십만 명이 기아 , 과로 , 질병 , 구타 , 감금 , 폭행으로 사망했다 .
이전 정부와 관련되거나 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많은 지식인과 전문직 종사자 , 종교인이 무자비하게 처형됐다 . 캄보디아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소수민족도 숙청 대상이었다 . 처형의 죄목은 매우 자의적이고 모호했다 . 안경을 끼거나 손이 곱다는 이유로 노동을 모르는 지식인으로 몰아 처형하기도 했다 . 불충하다고 의심되는 공산당 당원이나 군인도 표적이 됐다 .
프놈펜의 투올슬렝 감옥은 크메르루주 시기의 잔혹함을 상징한다 . 정치범 수용소이던 이 감옥은 크메르루주 시기에 꾸준히 수감자가 늘었다 . 무고한 사람들이 이 수용소에서 끔찍한 고문을 받고 처형당했다 . 처형 방식도 잔인했다 . 총알을 아낀다는 이유로 몽둥이로 때려 죽이거나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사시키기도 했다 . 한 번 들어가면 살아나온 사람이 거의 없어 ‘캄보디아의 아우슈비츠’라고도 불렀다 .
폴 포트가 정권을 잡은 동안 약 200 만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 이는 당시 캄보디아의 총인구 4분의 1 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였다 .
폴 포트의 유년기와 청년기는 그가 일으킨 대참극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복했다 . 그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인 1925 년 5 월 19 일 캄보디아 캄퐁톰 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는 넓은 농지를 소유한 부유농이었다. 폴 포트의 가족은 캄보디아 왕족과 긴밀한 관계였는데, 사촌누나와 이복누나가 당시 왕인 시소와트 모니봉 (1927~1941 년 재위 ) 의 후궁이었기 때문이다 . 폴 포트는 이복누나와 가까운 사이라 그를 찾아서 후궁들이 머무르던 공간에 여러 차례 방문했다 .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기 힘들던 1930 년대의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당시 최고 수준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소수의 지식인이었다 .
폴 포트는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 그가 다니던 미셰학교 에서 초등교육 졸업장을 받는 데 예정보다 2 년이나 더 걸렸다 . 그는 중학교 졸업 뒤 1948 년 캄보디아의 명문 리세시소와트 고등학교에 합격했으나 , 이후 상급반 진학에 실패해 기술학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이는 곧 전화위복이 됐다 . 이 기술학교의 최고 학년에 편입한 1949 년 , 폴 포트는 국비 장학생으로 프랑스 공과대학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 1900 년대 초부터 이때까지 자비 유학생을 포함해 외국에 유학을 다녀온 캄보디아인이 250 명이 채 넘지 않았던 시기다 . 폴 포트는 이제 더욱 극소수의 상류층이 됐다 .
1949 년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 24 살의 ‘살로트 사르’ 는 처음으로 좌파와 공산주의 사상을 접한다 . 당시 프랑스는 프랑스혁명 이후 공산주의 사상 연구가 활발했다 . 1951 년 그는 파리로 유학 온 다른 캄보디아 학생과 함께 마르크스 클럽에 들어가 공산주의를 공부했고 , 얼마 뒤 프랑스 공산당에도 가입했다 . 이 시기 폴 포트는 나중에 크메르루주를 함께 이끈 캄보디아의 젊은 좌파 민족주의자 그룹과 교류하게 된다 . 폴 포트와 동지들은 스탈린주의와 마오쩌둥주의 , 그리고 프랑스혁명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 폴 포트는 캄보디아 사회를 공산화해 사회 불평등을 제거하면 캄보디아도 부유한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여겼던 듯하다 .
그는 파리에서 공부보다 혁명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 2 학년 통과 시험에서 2 년 연속 떨어져 장학금 지급이 중단됐다 . 결국 그는 학위 없이 3 년6개월 정도의 파리 체류를 마치고 1953 년 프놈펜으로 돌아가야 했다 .
귀국 뒤 폴 포트는 프놈펜에서 캄보디아의 마르크스 - 레닌주의 운동 (Cambodia's Marxist – Leninist Movement) 의 중심 멤버로 활약했다 . 당시 군주제에 반대하며 노로돔 시아누크 (1941~1955 년 재위 ) 왕의 정부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에 참여했던 그는 , 1970 년 쿠데타로 론 놀이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우익 친미 정권을 수립하자 이번에는 시아누크와 연합해 론 놀 정권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 작은 무장단체에 불과하던 크메르루주가 확대된 것도 이 무렵이다 . 공산주의가 뭔지 모르고 관심도 없던 많은 사람이 그들의 국왕을 지키기 위해 크메르루주에 들어왔다 . 크메르루주는 결국 1975 년 론 놀 정권을 전복하고 프놈펜을 점령했다 . 이 성과는 역설적으로 캄보디아 암흑시대의 서막이었다 .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는 대규모 강제이주와 집단농장제를 통한 강제노동 정책 , 그리고 킬링필드라는 반인륜적 학살을 저질러 수많은 캄보디아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 결과 국민의 마음을 잃었다 . 1979 년 1 월 베트남 침공으로 크메르루주 정권은 몰락했다 . 폴 포트를 비롯한 크메르루주의 간부들은 타이 국경 근처 정글로 후퇴했다 .
그곳에서 1990 년대까지 게릴라전을 계속했지만 점차 세력이 약해졌다 . 1997 년 6 월 폴 포트는 조직 지도부에서 강제로 축출돼 동료들에 의해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 그 해 7 월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 하지만 그는 감옥에 가지 않고 다음해인 1998 년 4 월 15 일 수면 중에 73살로 사망했다 . 엄청난 인명을 앗아간 최악의 독재자치고는 너무나 평화로운 최후였다 . 죽은 지 사흘이 지나 그의 주검은 주변의 타이어와 쓰레기 더미 위에서 화장됐다 .
폴 포트는 권력에서 몰락해 죽을 때까지 자기 잘못을 뉘우친 적이 없다 . 자신이 저지른 강제 정책을 ‘ 실수 ’ 라고 하거나 자기 양심이 깨끗하다고 해서 많은 사람을 경악하게 했다 . 크메르루주가 쫓겨난 지 40여 년이 지났지만 , 크메르루주의 범죄는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다 . 그 정권에 몸담은 인사 중 아직 권력 가까이에 있는 이들도 있다 .
2022 년 9 월 , 프놈펜에서 캄보디아특별재판소 (ECCC) 의 마지막 재판이 있었다 . 흔히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으로 부르는 이 재판은 20 세기 후반 최악의 반인도적 전쟁범죄를 저지른 크메르루주 집단의 책임자들을 단죄할 목적으로 열렸다 . 그러나 16 년이라는 긴 시간과 국제사회가 기부한 막대한 예산을 쓰고도 단 5 명을 재판에 회부해 3 명에게 무기징역을 판결하는 데 그쳤다 . 그마저도 크메르루주 정권의 최고위층은 재판 중 , 또는 복역 중 사망해 마지막 재판을 피해갔다 .
폴 포트의 전기를 쓴 필립 쇼트는 크메르루주 대학살의 원인 중 하나로 1970 년대 이래 계속된 미국의 무자비한 공습을 꼽는다 . 이로 인해 폴 포트 정권이 급속도로 과격해지고 폭력화됐다는 것이다 . 폴 포트가 지상에 모든 도시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것을 말소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순수한 이념에서 이 모든 일을 시작했음을 강조하려는 이도 있다 . 하지만 아무리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그가 저지른 참담한 비극은 전혀 옹호될 수 없다 .
크메르루주 몰락 뒤 40 여 년이 지난 오늘날, 캄보디아는 여전히 폴 포트의 잔혹한 유산과 싸운다 . 어린 나이에 공산주의 사상에 세뇌돼 살아남으려 잔혹한 고문과 처형을 수행한 소년병들은 아직도 엄청난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 폴 포트 정권기에 악몽 같은 경험을 겪은 생존자들을 지원하는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는 이도 있다 . 대학살을 기억하는 50 대 이상의 사람들이 현재 캄보디아 인구의 10% 에 불과하다는 점이 유일한 위안이다 .
투올슬렝 교도소와 킬링필드의 유골들은 소수 지식인의 그릇된 신념이 얼마나 큰 불행과 비참한 상황을 일으킬 수 있는지 잊지 못하게 한다 . 최악의 지도자 한 사람이 초래한 최악의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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