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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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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34명을 시작으로 일본·프랑스·미국을 물리치다

베트남 국민의 영원한 장군 ‘붉은 나폴레옹’ 보응우옌잡
등록 2023-06-23 20:50 수정 2023-06-26 20:28
1995년 4월22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언론과 인터뷰하는 보응우옌잡의 모습. REUTERS

1995년 4월22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언론과 인터뷰하는 보응우옌잡의 모습. REUTERS

현대 베트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꼽자면 호찌민과 보응우옌잡(이하 잡)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잡은 호찌민보다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붉은 나폴레옹’으로 불리며 세계적 명장으로 인정받는다. 그는 젊을 때 <손자병법> <나폴레옹>을 읽었고, 백과전서에서 각종 병기에 대한 설명도 읽었다고 한다. 그는 ‘인민의 전쟁, 인민의 군대’ 개념을 제시하며,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다. 잡은 사망한 뒤에도 베트남 국민에게 영원한 장군으로 남아 있다.

교육자이며 민족운동가, 언론인으로 출발

잡은 2013년 10월 102살에 사망한 뒤 고향 꽝빈성의 동허이로 돌아갔다. 동허이는 긴 베트남 지도에서 중부 지역의 잘록한 허리에 있고 퐁냐께방 동굴지대와 가까운 곳이다. 어린 잡은 동허이 초등학교를 마치고 후에에 있는 꾸옥혹(國學)에 입학한다. 꾸옥혹은 5년제 중고등학교 과정으로서 베트남 최초의 유럽식 학교라고 할 수 있다. 호찌민·팜반동·하후이떱 등 사회주의 혁명가, 응오딘지엠 같은 자유주의 정치인도 이 학교를 다녔다.

1927년 잡이 2학년일 때, 당시 저명한 민족운동가이던 판보이쩌우의 사면과 판쩌우찐의 추모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퇴학당한 학생의 구명운동을 하다가 잡도 퇴학당한다. 잡은 당시 후에에 가택연금 중이던 판보이쩌우를 자주 만나 국내외 정세에 관해 대화를 나누며 식견을 넓혔다. 20세기 초기에 판보이쩌우와 판쩌우찐은 각기 입헌군주제와 공화제를 추구한 사상가이며 민족운동가로서 양대 산맥이었다.

잡은 1928년 17살 되던 해에 신월혁명당에 입당한다. 신월혁명당은 베트남 중북부 응에안과 하띤 지역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경향의 민족혁명단체였다. 1920년대 후반 베트남은 저항운동 고조기에 있었다. 1925년 베트남청년혁명동지회, 1926년 신월혁명당, 1927년 베트남국민당이 결성됐다. 1929년 잡은 후에에서 출판사 일을 시작했고, <띠엥전>(民聲) 신문의 집필에도 참여했다. 1930년 잡은 응에띤 소비에트 운동에 연루돼 2년형을 선고받았다.

보응우옌잡(왼쪽)과 호찌민. 한겨레 자료

보응우옌잡(왼쪽)과 호찌민. 한겨레 자료

응에띤 소비에트 운동은 베트남 중북부 응에안과 하띤 지역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해 일으킨 혁명운동이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격파되고 말았다. 1930년에는 다른 지역인 옌바이에서도 비사회주의 민족운동가들이 프랑스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1931년 말에 잡은 석방돼 고향집에 가택연금됐으나, 탈출해 후에로 돌아가 신문사에서 일을 지속했다. 그러면서 잡은 독학으로 1933~1934년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통과했다.

잡은 1935년 하노이로 가, 인도차이나대학 법학부에 입학원서를 냈다. 잡의 재능을 본 교수가 그에게 프랑스 유학을 권했으나, 잡은 베트남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1936~1939년 잡은 사립 탕롱 중고등학교 교사와 대학에서의 법률 공부를 겸하며, 많은 시간을 언론 활동에 쏟았다. 잡은 탕롱학교에서 프랑스어, 역사, 지리 교육을 맡았다. 잡은 베트남어 신문 <혼째>(젊은 혼) 등을 발간해 민생·민주 추구, 정치범 석방 등을 요구했다. 이 시기에 사회주의 혁명가 쯔엉찐과도 협력했다.

호찌민과 함께 베트남 독립 선포

잡이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혁명가들과 만난 것은 1940년이었다. 그는 중국으로 가 호찌민, 팜반동 등 사회주의 혁명가와도 만난다. 1941년 초 호찌민의 지시로 잡과 팜반동 등이 귀국해 혁명 거점을 짓고 간부 훈련을 시작했다. 그들은 중국 국경과 가까운 베트남 북부 산간의 까오방성 빡보의 석회암 지대에 은거지를 만들었다. 호찌민의 귀국도 이때 이뤄졌다.

이들은 1941년 5월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을 결성했다. 1944년 12월 호찌민의 지시로 잡은 대원 34명으로 베트남해방군선전대를 창설했다. 세계 강국을 물리친 베트남 인민군대는 이렇게 출발했다. 호찌민은 유격전에 관해 저술했고, 잡은 중국 장군 주더의 <항일유격전쟁>을 초역했다. 초기 베트남군은 군사활동보다는 정치활동을 더 중시했다. 그것은 북베트남이 군사적 승리보다는 정치적 승리로 베트남전쟁을 마무리한 단초였다고 할 수 있다.

국내외 정세는 급격히 변했다. 연합군의 베트남 진입을 우려해, 1945년 3월 일본은 베트남을 직접통치로 전환했다. 일본은 1940년 베트남 북부를 침공하고 다음해 전국을 장악하며 프랑스와 이중 식민지배를 허용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해 호찌민의 베트민은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해 게릴라전을 개시했다. 1945년 8월 베트민은 베트남해방민족위원회를 설립하고 전국 무장봉기를 결정했다. 8월19일 하노이 봉기 뒤, 잡은 8월26일 하노이로 입성했다. 9월2일 바딘 광장에서 호찌민 주석은 독립선언을 낭독했고, 잡은 임시정부의 활동계획을 낭독했다. 이렇게 민족혁명가들은 베트남 독립을 선포했다.

2006년 8월1일 보응우옌잡(오른쪽 둘째)이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준 검을 보고 있다. REUTERS

2006년 8월1일 보응우옌잡(오른쪽 둘째)이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준 검을 보고 있다. REUTERS

베트남민주공화국은 임시혁명정부를 구성해, 호찌민이 주석 겸 외교부 장관을 맡고, 잡은 내무부 장관을 맡았다. 호찌민이 잡에게 내무부 장관을 맡긴 것은 국가 건설 초기 기틀을 잡으려는 의도라고 여겨진다. 이렇게 베트남인은 독립국가를 출범시켰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 획책한다. 1946년 12월부터 양쪽이 전쟁을 벌여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치렀다.

1946년 12월19일 저녁 8시, 하노이의 전등이 꺼지고 주변 포대에서 대포가 발사됐다. 전투가 개시된 것이다. 이후 60일간 전투는 계속됐고, 베트민 세력은 하노이를 프랑스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잡은 1947년 10월 비엣박에서 베트남군의 첫 번째 대규모 저항전쟁을 벌였다. 75일간 전투에서 베트민이 승리를 거뒀다. 이후 잡은 인민군대에 게릴라 유격전을 지시했고, 민병을 조직했고, 그 수는 1949년 약 100만 명에 이르렀다. 잡은 1949년부터 강력한 주력부대 건설을 추진했다. 1950년 잡은 대장으로 승진했고, 베트남군은 국경지대 전투를 확대했다. 이후 베트남군은 쩐흥다오 작전, 꽝쭝 작전, 떠이박 작전 등을 통해 하노이 서북부 지역에서 세력권을 확장했다.

‘디엔비엔푸 작전’ 사령관으로 승리 이끌어

잡의 베트남군은 베트남 북부와 중부, 라오스 등 5개 지역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1953년 5월 프랑스의 앙리 나바르 사령관이 베트남에 부임하며 18개월 내에 패배를 승리로 변화시킨다고 장담했다. 나바르는 베트민의 주력군이 베트남 서북 지역으로 집결한다는 정보를 듣고 디엔비엔푸에 프랑스군을 집결해 베트민군을 격파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디엔비엔푸는 북서부 산간지대의 밀림으로 둘러싸인 분지였다. 미국은 디엔비엔푸의 요새 건설을 지원했다.

베트남공산당 정치국은 1953년 12월 잡을 사령관으로 한 디엔비엔푸 작전을 승인했다. 베트남은 군사력으로 도저히 프랑스를 상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베트남군은 인력으로 대포를 산으로 끌고 올라가고 자전거로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등 그야말로 간난신고 끝에 디엔비엔푸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전 인민이 합심, 분투해 만든 결과였다. 그것은 “인민의 전쟁”이었다.

호찌민의 병상에 들른 보응우옌잡(검은 옷 입은 이). 한겨레 자료

호찌민의 병상에 들른 보응우옌잡(검은 옷 입은 이). 한겨레 자료

베트남의 승리는 독립과 통일로 이어지지 못했다. 전쟁 관련국들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베트남 분단안에 서명했다. 미국과 남베트남이 되는 베트남국은 절반의 공산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서명하지 않았다. 베트남 북부는 베트남민주공화국, 남부는 베트남국이 통치하게 됐다. 남부는 1955년 베트남공화국으로 전환해, 베트남은 베트남민주공화국과 베트남공화국이 대치하는 형세로 됐다.

베트남이 분단된 뒤 1955년, 잡은 북베트남의 부총리 겸 국방부 장관을 맡았다. 잡의 과제는 북부 방위와 남부 통일을 위한 근대적 군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한편 남북 베트남의 긴장은 강화돼 1964년께 열전으로 확대됐다. 이것이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곧 베트남전쟁이다. 전쟁은 통일을 위한 내전이면서 동시에 외국이 개입한 국제전이었다. 미국은 그 전부터 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을 보내고 군수지원을 통해 개입했다. 열전의 계기는 통킹만 사건으로 알려졌다. 1964년 7월부터 미국은 베트남 북부 통킹만에 구축함을 보내 정보를 수집했다. 8월에 북베트남이 이에 공격했고, 미국은 보복 폭격을 했다. 미군은 2차 공격까지 있었다고 미 정부에 보고했으나, 2차 공격은 없었다는 것이 나중에 알려졌다.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에 직접 전투병을 파견하며 개입하게 된다.

분단을 넘어 통일 국가로

이즈음 북베트남도 전투병을 남부로 파견했다. 전쟁은 격화됐고, 1968년 1월31일 음력설(구정)을 계기로 남부에 있던 공산세력은 총봉기해 ‘구정 공세’를 일으켰다. 구정 공세는 남부 정권과 그 후원 국가뿐 아니라 공산세력에도 큰 피해를 남겼다. 구정 공세 이후 미국은 북베트남과 협상을 개시했고, 미군을 철수하려 “베트남전의 베트남화” 정책을 펼쳤다. 협상은 오래 걸렸고, 1973년 1월에야 파리협정으로 귀결됐다. 이로써 모든 외국 군대는 철수하게 됐고, 이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공격해 1975년 4월 무력으로 통일을 이뤘다. 이 과정에서 상대적 온건파는 장기간의 정치투쟁과 무력투쟁을 겸비해 통일을 이루는 노선을 추구했다. 강경파는 조속한 무력투쟁으로 통일을 이루는 노선을 견지했다.

베트남의 혁명가들이 통일에 전력투구했음에도, 공산당 내 권력경쟁은 남아 있었다. 1969년 호찌민이 살아 있을 때까지 베트남의 최고위 지도부는 대체로 호찌민 주석, 레주언 제1비서, 쯔엉찐 국가주석, 팜반동 총리, 잡 국방부 장관의 구도를 이어갔다. 공산당 내 잡의 서열은 6위로 유지됐다. 그러나 당내 권력경쟁은 1982년 제5차 공산당대회에서 잡을 정치국 위원에서 탈락시키는 결과를 만들었다. 그 뒤 레주언이 1986년 7월 사망하고, 그해 12월에 열린 제6차 공산당대회에서 당의 원로인 쯔엉찐·팜반동·레득토가 물러남으로써, 제1세대 정치 지도자들은 모두 정치무대의 최전선에서 물러났다. 그들보다 더 젊은 정치 지도자들에게 베트남은 맡겨졌다.

이한우 전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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