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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의 도시에서 태어나고 잠들다

점보제트여객기 보잉 747 개발 지휘하며 장거리 항공여행의 새 시대 열었던 조 서터
등록 2016-09-07 21:40 수정 2020-05-03 04:28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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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 기종에 무지한 사람이라도 ‘보잉 747’이란 이름은 익숙할 것이다. 보잉사의 747기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항공기 기종이다. 1969년부터 현재까지 1500대 이상 생산되며 오랜 세월 항공기 업계의 패권을 차지해왔다. 기존에 없던 초대형 점보여객기의 등장은 당시 항공업계의 일대 혁명이었다.

그 전까지 항공기의 최대 탑승 인원은 200여 명. 보잉 747은 4개의 대형 엔진을 탑재한, 부분 2층짜리 거대한 기체로 500여 명을 태울 수 있다. 높은 수송 능력과 그에 따른 항공운임료 인하로 장거리 항공여행의 대중화와 보편화를 이끌었다. 미국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을 비롯해 한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 전용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우주왕복선을 수송하는 데도 쓰여왔다.

4500여 명의 기술자와 함께 연구

1960년대 보잉 747 개발팀을 지휘하며 장거리 항공여행의 현대를 열어젖힌 ‘보잉 747의 아버지’, 미국 보잉사의 전설적인 항공엔지니어 조 서터가 지난 8월30일 미국 워싱턴주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5.

에 따르면 보잉사의 상업항공기 분야 최고경영자(CEO) 레이 코너는 서터를 “우주항공 업계의 거인”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보잉사의 직원들뿐 아니라 전체 우주항공 산업에 큰 영감을 주었다.”

조 서터는 1946년부터 보잉사에서 일했다. 그때만 해도 항공기가 아직 프로펠러를 동력으로 삼던 시절이다. 서터는 보잉의 초기 제트기 모델인 707, 727, 737 등의 개발에 참여해 보잉사가 제트기 시대로 도약하는 데 일조했다.

이어 등장한 747기는 제트기 시대의 상징이자 보잉사의 오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747기 개발의 선두에 서터가 있었다. 그는 1965년 4500여 명의 엔지니어·정비공·관리자로 구성된 팀과 함께 새로운 장거리 점보 제트여객기인 747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지구상에 유례없는 크기의 항공기를 수용할 공장이 없었기 때문에 보잉사는 미국 워싱턴주 에버렛에 약 300만m²의 땅을 구입해 공장을 신설했다.

747기 제작을 주문한 이는 팬아메리칸항공의 설립자 후안 트리페 회장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크기’였다. 그는 보잉사에 350석 이상의 좌석을 확보할 수 있는 항공기를 주문했다. 당시 생산되던 737기 수용 좌석 수의 2배가 넘는 규모였다.

트리페 회장이 제시한 항공기 디자인은 전체 2층으로, 중앙에 한 줄짜리 통로가 배치된 것이었다. 서터는 그가 제시한 초기 디자인을 거부했다. 대신 아주 넓은 한 층짜리 데크에 두 줄의 통로를 배치하고, 머리 부분만 2층으로 이뤄진 부분 복층 디자인을 고안했다. 무게와 연료 효율, 안전성 등의 이유를 고려할 때 트리페 회장의 디자인은 거대 여객기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서터와 보잉사는 실물 크기의 비행기 모형을 제작했고 공장으로 트리페 회장을 초대해 설득했다. 트리페 회장은 “당신의 의견이 옳았다”며 물러났다. 그렇게 첫 ‘와이드보디’(wide-body, 광폭 동체) 제트항공기가 탄생할 수 있었다.

서터가 이끈 팀은 세계 최대 항공기를 구상부터 생산까지 불과 29개월 안에 만들어내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업계에 ‘인크레더블’(the Incredibles)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졌다.

보잉 747이 1968년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많은 사람이 놀라움과 동시에 의구심을 가졌다. 길이 70m, 폭 60m에 4개의 제트엔진을 장착한, 31만kg의 무게를 자랑하는 이 거대 괴물이 하늘을 날 수 있을까? 이듬해 2월9일 747의 첫 비행이 실시되었고 2시간 동안 성공적으로 비행하자 의구심은 해소되었다. 수천만 명의 보잉사 직원들이 활주로에 모여 박수를 치며 눈물을 훔쳤다.

당시 보잉사에 747은 부수적인 프로젝트였다. 곧 여객기 시장을 지배하리라 전망되던 초음속여객기 개발이 이들에겐 1순위였다. 보잉 747이 좋은 여객기임과 동시에 효과적인 ‘화물운송기’가 되도록 설계된 건 그 때문이다. 필요하면 언제든 화물기로 전환해 판매할 수 있어야 했다. 747의 가장 특징적인 실루엣인 머리의 혹처럼 튀어나온 부분은, 메인 데크 위에 조종실 데크가 배치된 복층 구조로 바로 이러한 공학적 설계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747과 동시에 진행하던 보잉사의 초음속기 프로젝트는 결국 무산되었고, 후일 다른 초음속기 프로젝트들도 소음이 심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좌절되었다.

35억 명 실어나른 ‘하늘 위 궁전’

첫 비행 11개월 뒤 보잉 747은 팬아메리칸항공을 통해 처음으로 승객 대상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후 35억 명 이상의 승객을 실어나르며 상업항공기 분야에서 20년 이상 보잉사의 지배력을 유지했다.

승객들에게는 넓고 쾌적한 공간을 제공해 ‘하늘 위 궁전’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장거리 여행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10개의 좌석을 나란히 배치한 넓은 객실 공간과 그 사이 두 개의 통로, 솟아오른 2층 공간을 칵테일바, 레스토랑풍 식사를 제공하는 1등석 라운지로 바꾼 것도 서터가 이뤄낸 혁신이었다.

에 따르면 서터는 2006년 자서전 에 이렇게 썼다. “그것은 내 경력의 정점을 떠나, 내가 어린 시절부터 늘 꿈꿔오던 것이었다.”

조 서터는 1921년 3월21일 미국 시애틀의 슬로베니아 출신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보잉사 창립 5년 뒤였다. 그의 일생은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은 항공우주 기업 보잉사의 역사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애틀은 ‘보잉 기업 도시’라 할 만했다. 많은 지역 주민이 보잉사에서 일했고, 서터는 ‘보잉 힐’이라는 별칭이 붙은 비컨힐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터의 집은 항공기 시험비행 경로 바로 아래에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모형 비행기를 만들었고, 워싱턴대학에서 항공학을 전공했다.

1943년 졸업 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미 해군구축함에서 근무했다. 1946년 시애틀로 돌아와 캘리포니아 지역의 항공우주 업체 더글러스 에어크래프트의 일자리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내가 첫아이를 낳기 직전이었던 터라 서터는 캘리포니아에 가는 것을 잠시 미루고 보잉사에 임시직으로 일하게 된다. 이후 40여 년 동안 그는 시애틀과 보잉사를 떠나지 못했다.

서터는 보잉사의 첫 제트기인 707을 거쳐 727기 개발에 참여했고, 737기를 개발하는 동안 첫 특허를 획득했다. 넓은 기체 공간을 확보해 화물 수용력을 높일 수 있도록 꼬리 뒤쪽이 아니라 날개 아랫면에 엔진을 장착하는 기술이었다. 737기는 상업항공기 역사상 가장 잘 팔린 항공기로 기록됐다.

에 따르면 그는 현실적인 일처리 방식과 문제 해결 능력으로 보잉사의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인물이었다. ‘747 프로젝트’ 당시 회사 쪽이 비용 삭감을 이유로 4500명인 서터의 팀을 1천 명으로 줄이도록 요구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후일 서터는 자서전 에 당시 고위 간부 회의장을 빠져나오면서 자신이 해고될 것을 확신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신의 일자리와 팀원 모두를 지켜냈다.

그는 보잉사의 엔지니어링 분야 책임자가 되어, 1986년 65살의 나이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재직했다. 같은 해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사건 조사위원회에 참여해, 우주왕복선에 더 엄격한 안전 기능을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말년에도 보잉사 고문으로 왕성히 일했으며, 1985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국가기술혁신 훈장을 받았다.

승객들이 처음 탑승하던 그 순간

은 8월27일 747기종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처지에 이르렀다고 보도했다. 항공사들이 유지·보수 비용과 연비 등의 이유로 작은 쌍발엔진 여객기를 선호하면서 수주가 급감해, 보잉사가 40여 년 만에 생산 중단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터는 “내 삶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가 747기에 승객들이 처음으로 탑승하던 장면을 보는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들은 입구 안쪽에 갑작스럽게 멈춰서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이건 비행기가 아니야. 그들의 놀란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건 커다란 방이잖아!”()

이제 서터와 747의 시대도, 점보여객기의 시대도 저물고 있다.

이로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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