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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존엄한 파티

스스로 삶을 끝내는 의식에 친구들 초대한 미국 화가 베치 데이비스
등록 2016-08-31 20:47 수정 2020-05-03 04:28
베치 데이비스가 ‘재탄생 의식’을 앞두고 침대에 누워 웃고 있다. AP 연합뉴스

베치 데이비스가 ‘재탄생 의식’을 앞두고 침대에 누워 웃고 있다. AP 연합뉴스

근위축성측색경화증(ALS). 원인을 알 수 없는 퇴행성 신경질환으로 이른바 ‘루게릭병’이라고 한다. 이 병에 걸리면 대뇌와 척수의 운동신경원이 선택적으로 파괴된다. 초기에는 손발의 힘이 떨어지고, 말투가 어눌해지며, 삼키는 능력이 떨어진다. 병이 진행되면서 차츰 온몸의 근육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결국 숨을 쉬지 못하게 된다. 환자의 50%가량이 발병 뒤 3~4년 안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해 질 녘 재탄생 의식

화가이자 행위예술가인 베치 데이비스의 삶에 대해선 알려진 게 많지 않다. 가족과 친구들의 말을 딴 보도를 종합하면, 그는 1975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태어났다.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 자리한 아트센터디자인대학을 졸업한 그는 영국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곱슬한 빨간 머리에, 얼굴은 주근깨투성이다. 쾌활한 성격에 오토바이를 몰고 다녔으며, 전세계를 두루 여행했다. 데이비스가 개인 누리집( queenofplastics.com)에 올린 이력을 보면, 2002년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각종 공연과 전시활동을 하는 틈틈이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등지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전시회는 대학원을 다녔던 에든버러의 스코틀랜드국립미술관에서 2012년 열렸다.

이듬해인 2013년 6월 데이비스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언제 몸을 움직이지 못할지 모른다. 그는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여행을 다녔다. 점차 몸이 굳어져갔다. 전동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됐다. 점차 말도 할 수 없게 됐다. 마흔한 살, 삶이 끝나가고 있었다.

2015년 9월 캘리포니아주 의회는 오랜 논란 끝에 의료안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의 핵심은 ‘삶을 끝내는 선택’ 조항이다. 18살 이상의 성인으로, 치명적인 병에 걸려, 남은 삶이 6개월 미만이며, 온전한 판단력을 갖추고 있다면, 의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뼈대다. 이른바 ‘존엄사’다. 법은 지난 6월9일 발효됐다. 그로부터 3주 뒤 베치 데이비스는 친구들에게 전자우편 한 통을 보냈다. 작가 겸 영화감독인 친구 케스트린 팬테라는 8월22일 인터넷 매체 에 기고한 글에서 편지 내용을 이렇게 소개했다.

“지구별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또 다른 모험이 펼쳐질 것이다. 그간 의료진을 통해 존엄사 신청을 마쳤다. 7월24일 해 질 녘에 ‘재탄생’ 의식을 치를 계획이다. 참석을 원하는 사람은 미리 예약을 해달라.”

미국에서 처음으로 존엄사를 합법화한 곳은 오리건주다. 1997년 10월27일 처음으로 존엄사가 허용됐다. 이어 워싱턴(2008년)과 버몬트(2013년) 등이 각각 존엄사 제도를 도입했다. 뉴멕시코 등 일부 지역에선 제도 자체는 도입되지 않았지만, 개별 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을 통해 ‘반합법화’한 지역도 있다. 캘리포니아는 미국에서 5번째로 존엄사를 합법화한 지역이 됐다.

1997년 제도 도입 이후 지금까지 오리건주에서 존엄사를 선택한 사람은 모두 752명에 이른다. 오리건주에서 한 해 숨지는 이들 가운데 0.2%에 해당하는 수치다. 의학전문지 은 2000년 2월24일 오리건 주정부 자료를 따 “존엄사 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다. 신청자 6명 가운데 1명 정도만 존엄사에 필요한 의료진의 처방을 받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처방받은 환자가 모두 존엄사를 실행에 옮기는 것도 아니다. 처방받은 3명 중 1명은 약물을 손에 넣고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오리건주에서 그간 존엄사 처방을 받은 이들은 모두 1173명에 이른단다.

“제 앞에선 절대 울지 말아주세요”

팬테라가 답신을 보내고 얼마 뒤 데이비스가 다시 전자우편을 보내왔다. 제목란에는 ‘파티’라고 적혀 있었다. 'AP통신'은 지난 8월12일 편지 내용을 이렇게 전했다.

“저의 ‘재탄생’ 기념 파티에 참가하기로 한 모든 분들께,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저를 환송해주기 위해 기꺼이 모이겠다고 밝혀주신 여러분 모두 정말 용기 있는 분들입니다. 규칙은 따로 없습니다.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오세요. 여러분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세요. 춤추고, 폴짝폴짝 뛰고, 소리 지르고, 노래하고, 함께 기도합시다. 하지만 제 앞에선 절대 울지 말아주세요. 그 규칙 하나면 됩니다. 이번 세상에서 우리가 함께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즐겁고 유쾌한 자리가 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정말 울음을 참지 못하겠거든, 따로 마련해둘 지정석을 이용해주세요. 아니면, 그냥 잠시 한쪽 구석으로 가시든지요. 저는 울어도 됩니다. 루게릭병의 증상 가운데 하나가 웃음과 울음을 통제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운다면 여러분 때문에 우는 게 아닙니다. 제 신경세포가 망가졌기 때문이죠. 하지만 제가 웃는다면, 그건 전적으로 여러분 때문일 겁니다.”

‘파티 초대장’은 결혼식 일정표 같았다. 1박2일의 마지막 여정을 위한 계획이 빼곡했다. 지난 7월23일 가족과 친구 30여 명이 캘리포니아주 남부 산악 휴양지 오하이에 자리한 데이비스의 집으로 모였다. 한 친구는 화려하게 장식한 풍선을 한 아름 들고 왔다. 풍선에는 “재탄생을 축하해”라고 적혀 있었다. 첼로를 들고 온 친구도 있었다. 다른 친구는 하모니카를 준비했다. 부둥켜안고 사진을 찍고, 웃고 떠들었다. 영화를 찍는 친구가 모든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루를 그렇게 보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했다. 7월24일 오후 4시께 전채로 멕시코식 타말레를 먹기 시작했다. 데이비스의 단골 가게에서 주문한 피자가 도착했다. 오후 5시부터는 칵테일 파티였다. 데이비스가 좋아하는 영국 팝과 인디 록을 들었다. ‘뉴오더’와 ‘픽시스’의 음악에 맞춰 흥을 돋웠다. 이어 데이비스가 제일 좋아하는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단편영화 을 함께 봤다. 데이비스는 미리 아끼는 물건을 모두 꺼내놓았다. “이 물건들을 통해 너희들 곁에 머물고 싶어.” 친구들은 쇼핑을 하듯 물건을 골랐다. 가끔씩 자리를 비운 친구들도 있었다. 잠시 뒤 돌아온 이들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윽고 자동차 한 대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테슬라의 최신 전기자동차 ‘모델 엑스’다. 독수리 날개처럼 열리는 문을 보며, 데이비스가 활짝 웃었다. 도우미가 그를 안아 차에 앉히는 동안 친구들은 환호성을 울리며 박수를 쳤다.

집 앞 저만치 떨어진 언덕에는 흰색 천막이 쳐져 있었다. 간이침대도 준비돼 있었다. 함께 언덕에 오른 이들이 석양을 바라봤다. 이제 ‘의식’을 치를 차례다. 데이비스가 2014년 일본 여행길에 사온 흰색과 파란색 줄무늬로 된 기모노를 입었다.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는 친구가 매무새를 가다듬어줬다.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시간을 주기 위해 친구들은 천막 밖으로 나갔다. 팬테라는 데이비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너 오늘 정말 예뻐. 이따가 봐.”

사인, 자살 아닌 루게릭병

6시45분이었다. 도우미가 모르핀과 수면제 등으로 이뤄진 처방약을 내왔다. 그의 동생 켈리 데이비스는 8월9일 에 기고한 글에서 “약을 편하게 먹게 해주려고, 코코넛우유에 설탕과 소금을 살짝 섞어줬다”고 썼다. 15분쯤 지났을까? 데이비스는 의식불명 상태가 됐다. 심장은 여전히 박동을 멈추지 않았다. 의사는 데이비스의 심장이 언제쯤 멈출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몸은 다시 집 안으로 옮겨졌다. 친구들은 그의 손과 발에 유향과 아로마 오일을 발라줬다.

집 밖으로 나온 친구들은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밤 10시35분 데이비스의 심장이 멈췄다. 향년 41. 는 8월16일치에서 “캘리포니아주 개정 의료안전법에 따라, 데이비스의 사인은 ‘자살’이 아니라 ‘루게릭병’으로 기록됐다”고 전했다.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던 친구들은 내년 6월 데이비스의 마흔두 번째 생일에 다시 모여, 그의 유해를 함께 뿌려주기로 했단다.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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