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 빅토어 프랑클, 안네 프랑크, 그리고 엘리 위젤. 이들은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에 희생됐거나 가까스로 생존해 돌아온 자들로, 지금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홀로코스트 문학’의 대표적 저자들이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문학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일종의 침묵기가 있었다. 1945년 종전 뒤 인간의 사고 범위를 넘어서는 끔찍한 참상에 대해 공개적으로 입 여는 생존자는 거의 없었다. 이후 10여 년간 세계는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수감번호 ‘A-7713’엘리 위젤 역시 그랬다. 그는 1944년 가족과 함께 죽음의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생존해 돌아왔다. 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그는 “목격자로서 책임을 지고 살아남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적어도 10년 동안은 그가 본 것에 대해 말하거나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에 따르면 그는 후일 이 결심에 대해 “나는 잘못된 말(wrong words)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담은 엘리 위젤의 대표작 (1960)는 이런 침묵을 깨고 나온 홀로코스트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는 설명 불가능한 사건을 말하는 것의 무용함과 그것을 증언해야 한다는 필요 사이의 갈등 속에, 적막한 문장으로 수용소의 삶을 전한다.
그 전까지 홀로코스트 희생자로서 유대인이 쓴 것 중에 알려진 책은 가 전부였다. 독자는 안네라는 어린 소녀가 나치를 피해 은신처에 숨어 쓴 기록을 읽으며 눈물을 흘릴 뿐 강제수용소의 현실과 정면으로 부딪칠 수는 없었다. 영국 일간 은 “위젤은 그의 대표작 를 가 가진 강력한 감상주의의 해독제로 여겼다”고 썼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루마니아 출신 유대계 작가 엘리 위젤이 지난 7월2일 미국 뉴욕 맨해튼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 죽는 순간까지 그의 왼팔에는 아우슈비츠의 흔적, 수감번호 ‘A-7713’이 새겨 있었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위젤의 사망 뒤 발표한 성명에서 “위젤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도덕적 목소리이자, 세계의 양심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부헨발트 수용소의 철조망과 감시탑 사이를 함께 걸으며 그가 내게 한 말을 잊지 않고 있다. ‘기억은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의 신성한 의무가 되었다.’”
망각과 폭력에 대한 저항. 그것은 위젤이 평생 소리 높여 말해온 주제였다. 그는 를 비롯한 소설, 희곡, 에세이 등 50여 권의 저작과 대중 강연, 대학 강의, 공적 발언과 행동을 통해 ‘기억’의 긴급한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미국 워싱턴에 1993년 설립된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을 세우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죽은 자를 대신해 말할 수 없다”그는 유대인 문제뿐 아니라 전세계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대변자를 자처했다. 그의 ‘경험’에서 비롯한 ‘도덕적 권위’는 발언에 힘을 실었다. 그는 소련의 핍박받는 유대인들에 대해, 캄보디아·르완다·보스니아 지역의 대학살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규탄했다. 또한 1985년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이 독일 비트부르크의 나치친위대(SS) 묘지를 방문할 계획을 발표했을 때 그를 질책했고, 1993년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 헌정식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코소보와 발칸의 인종청소에 대한 미국의 행동을 촉구했다.
그는 한 명의 유대인 생존자라기보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궁극의 악에 의해 소멸해버린 모든 유령들의 살아 있는 대변자처럼 보였다. 비록 그는 노벨상 수락 연설에서 “내가 소멸된 다수를 대표할 권리가 있나? …그것은 주제넘은 생각일 것이다. 누구도 죽은 자를 대신해 말할 수 없다. 누구도 그들의 훼손된 꿈과 이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했지만 말이다. 1986년 노벨상 위원회는 그에게 평화상을 수여하면서 “위젤은 인류에게 온 메신저”라고 말했다.
엘리 위젤은 1928년 9월30일 루마니아의 시게트라는 작은 도시에서 1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엄격한 하시디즘(동유럽 유대인들에게 퍼진 신비주의 종파) 유대교도였으며 위젤은 어려서부터 신비주의적 분위기의 집안에서 자랐다. 영국 일간 에 따르면 어릴 적 그는 “사람보다 신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1944년 나치군이 진격해오면서 이 도시의 유대인 1만3천여 명은 모두 게토에 갇혔고, 곧 죽음의 수용소로 강제 이송됐다. 당시 15살 위젤 역시 가족과 함께 가축 운반차에 실렸다. 이후 어머니와 여동생은 그와 다른 그룹으로 분류돼 가스실에서 숨졌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아우슈비츠에 수용됐다.
신실한 유대교 소년인 위젤은 수용소에서 ‘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다. 에는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유명한 장면이 등장한다. 수감자들은 한데 모여 한 아이가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위젤은 뒤쪽에서 한 남자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듣는다. “맙소사, 신이시여, 신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위젤은 이렇게 썼다. “내 안의 목소리가 그에게 이렇게 답했다. ‘여기에 그가 있다. 지금 여기 교수대 위에서 죽어가고 있다.’”
러시아군이 진격해옴에 따라 위젤은 부헨발트 수용소로 옮겨졌다. 아버지는 1945년 1월 이곳에서 굶주림과 이질로 숨을 거뒀다. 위젤은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945년 4월11일 연합군에 의해 해방됐다.
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위젤은 다른 고아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프랑스 파리로 보내졌다. 그곳의 고아원에서 지내며 프랑스어를 익혔고, 1948년 소르본대학에 입학해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졸업 뒤 프랑스 월간지 기자가 되었다.
이즈음인 1949년 유대 왕국 이스라엘이 새롭게 건국됐고, 위젤은 이스라엘에 특파원으로 보내졌다. 그는 이스라엘 일간 의 파리 통신원으로도 일했다. 이때 노벨문학상 수상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아크와 인터뷰했는데, 모리아크는 위젤에게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글로 써보라고 권유했다.
이스라엘의 폭력에 침묵한 것 후회위젤은 자신이 맹세한 침묵을 깨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디시어(유대인 언어)로 쓰인 800쪽 분량의 원고가 완성됐다. 이것이 의 초고다. 당시 제목은 . 모리아크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판매는 저조했다. 원고는 계속해서 더 짧아졌다. 1958년 127쪽으로 대폭 줄어든 판본이 프랑스어로 번역돼 (La Nuit·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고, 이후 1960년 라는 제목으로 영역돼 미국에서 출간됐다. 나중에 이 책은 30개 언어로 번역됐다.
위젤은 1955년 미국으로 이주해 1963년 시민권을 얻었다. 에 따르면 는 미국판이 출간된 첫 18개월 동안 고작 1046권밖에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이 TV로 생중계되면서 홀로코스트의 실체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됐고, 위젤의 대중적 강연도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후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홀로코스트 저작과 영화 등이 세상에 나왔다. 는 미국에서 1천만 권 이상 팔렸다. 2006년 유명 TV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가 북클럽에 이 책을 소개하고, 위젤과 함께 아우슈비츠에 다녀온 뒤엔 300만 권이 더 팔렸다.
위젤은 전세계 많은 억압받는 이들을 대변해왔지만, 유대인 정통 국가인 이스라엘과 유대 민족주의가 개입된 문제에 대해서는 일종의 ‘사각지대’를 갖고 있다고 비판받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전쟁과 학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포위와 공격 등에 대해 침묵했다.
에 따르면, 위젤은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 중 “후회하는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해 내가 뭔가를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로사 객원기자전화신청▶ 02-2013-1300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 캠페인 기간 중 정기구독 신청하신 분들을 위해 한겨레21 기자들의 1:1 자소서 첨삭 외 다양한 혜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정우성 득남’ 소식이 쏘아올린 작은 공
‘정년이’ 큰일 했다…여성국극 연일 매진, 신작 제작도 활발
[단독] 실손보험 믿고 ‘툭하면 도수치료’…과잉진료 손본다
내일 서울 새벽부터 ‘첫눈’ 3~8cm…시, 제설 비상근무
단독사고 난 승용차 안에서, 흉기 찔린 부부 발견
“65살 정년연장은 단계적 적용…재고용 도입하면 ‘의무화’ 필요”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 임기만료 전역...임성근 무보직 전역 수순
[단독] ‘김건희 인맥’ 4명 문화계 기관장에…문체부 1차관 자리도 차지
위법 여부 따지는 한동훈…윤 닮은 ‘가족 스캔들’ 대처법
새가 먹는 몰캉한 ‘젤리 열매’…전쟁도 멈추게 한 이 식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