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옛 소련 간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 소련은 세계 최고의 체스 강국이었다. 이 시기 어떤 체스 경기는 단순한 경기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당시 막 소련에서 서방으로 망명한 반체제 인사와 소련 체스계에서 가장 촉망받던 ‘모범적 공산주의자’의 대국이라면 어땠을까? 1978년 필리핀에서 열린 빅토르 코르치노이와 아나톨리 카르포프의 세계 챔피언 타이틀매치는 정치 망명객과 성실한 공산주의자의 대결이자, 체스 역사상 가장 ‘이상한’ 경기였다고 회자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냉전 시대의 ‘이상한’ 체스 경기 </font></font>
47살의 코르치노이는 이미 4차례 소련 체스 챔피언에 오른 거물이었다. 당시로부터 2년 전인 1976년 그는 네덜란드에서 열린 체스대회에 참가했다가 귀국을 거부하고 망명했다. 상대인 카르포프는 그보다 20살이 어린 소련 체스계의 신성. 당시 세계 챔피언이었다. 이들의 싸움은 체스판 안팎에서 치열하게 진행됐다.
소련 언론은 의도적으로 코르치노이를 이름이 아닌 ‘상대 선수’ ‘도전자’로 불렀다. 카르포프는 경기 전 악수를 거부했다. 카르포프팀에는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들이 포함됐고, 그중에는 최면술사인 주크하르 박사도 있었다. 그는 관중석 첫째 줄에 앉아 코르치노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코르치노이는 주크하르의 행동이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며 항의했다. 그리고 그의 영향을 피하기 위해, 짙은 미러 선글라스를 낀 채 경기에 임했다. 코르치노이는 인도의 명상종교 수행자 두 명을 자신의 스태프로 참여시키기도 했다(당시 이들은 살인죄로 보석 중이었다고 한다). 카르포프는 코르치노이의 미러 선글라스 때문에 그의 눈을 볼 수 없을뿐더러 렌즈에 비친 상이 주의를 흩뜨린다고 항의했다.
소련 쪽 방해 공작과 코르치노이의 즉흥적인 대응은 계속됐다. 대회 도중 의자의 엑스레이 검사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코르치노이가 내건 국기에 대해서도 이의가 제기됐다(코르치노이는 망명국인 스위스 국기를 원했지만, 거부돼 결국 해적기를 건 채 경기에 나섰다). 카르포프팀이 경기 도중 그에게 요청하지도 않은 블루베리 요구르트를 보내자 코르치노이팀은 그것이 약속된 암호일 거라고 항의했다.
코르치노이는 초반 카르포프에게 주도권을 뺏겨 5 대 2로 지고 있다가, 후반 놀라운 회복세를 보이며 5 대 5 동점까지 몰아붙였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32차례 경기가 치러진 끝에 6 대 5로 카르포프의 승. 나머지 21경기는 무승부로 기록됐다.
코르치노이는 이후에도 여러 번 세계 챔피언 결승에 올랐지만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그는 오랫동안 체스 국제 무대에서 ‘세계 챔피언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가장 강한 체스 기사’로 여겨져왔다. 1976년 그는 소련의 체스 그랜드마스터(세계체스연맹(FIDE)이 공인한 최고 등급의 체스 기사) 중에선 처음으로 소련을 떠나 망명했으며, 이후 그의 경력 중 많은 부분이 냉전의 정치적 문제에 가려졌다.
세계적인 체스 그랜드마스터 빅토르 코르치노이가 6월6일 스위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 등에 따르면 그는 2012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해적기 걸고 경기 나선 코르치노이 </font></font>코르치노이는 1954년부터 1990년까지 70차례 국제 체스대회에 출전해 40차례 우승했다. 그중 단 7번만 3위 이하로 떨어졌다. 그는 체스의 대가들 중에서는 드물게, 나이가 들어서도 현역으로 주요 대회에 참가했다. 2007년에는 75살 나이로 세계 85위에 올라, 역사상 상위 100위에 든 최고령 선수의 영예를 얻었다. 은 “그에게 체스는 자유의 경험이었다”고 썼다. 소련 체제를 벗어난 그가 소련 체제 아래 이뤘던 성취를 능가할 때면, 소련 내 다른 체스 그랜드마스터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자극받았다.
빅토르 르보비치 코르치노이(Viktor Lvovich Korchnoi)는 1931년 3월23일 옛 소련의 레닌그라드(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6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체스를 배웠다. 어린 시절은 가난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얼룩져 있었다. 전쟁 중 아버지와 할머니가 사망했고, 그는 계모의 손에 자랐다.
전쟁 상황이 나아진 1943년, 그는 지역의 체스클럽에 등록해 본격적으로 체스를 시작했다. 1946년 레닌그라드 청소년 챔피언십과 이듬해 전국 청소년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서 재능을 드러냈다. 1952년 소련 체스 챔피언십 출전 자격을 얻었고 1960년, 1962년, 1964년, 1970년 모두 4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소련 체스 챔피언십은 당시 체스 강국이던 소련의 대표 선수들이 모여 있어 세계적으로 가장 우승하기 어려운 대회로 꼽혔다.
코르치노이는 ‘공격적인 반격과 집요한 수비’의 경기 스타일로 유명했다. 그는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도 타협을 배제하고 최대한으로 밀어붙이는 역습에 나섰고, 이후 끈질긴 방어로 상대를 지치게 해 ‘폭군 빅토르’로 통했다. 그는 일상에서도 종종 소련 당국에 저촉되는 노골적인 언행을 했다. 소련 당국은 보리스 스파스키나 카르포프 등 더 젊고 고분고분한 신성 체스 스타들을 선호했고, 그는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1974년 세계 챔피언 도전자 결정전에서 숙적 카르포프에게 패했을 즈음, 그는 당국의 압박이 심해짐을 느꼈다(카르포프는 이때 세계 챔피언이 되었고, 4년 뒤 ‘이상한’ 대회로 코르치노이와 다시 만난다). 코르치노이는 자주 소환됐고, 국제대회 출전은 불허되기 일쑤였다. 에 따르면 그는 자서전 (1977)에 “나는 내가 인민들에게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나는 도망쳐야만 했다!”라고 썼다.
1976년 그는 어렵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회의 참가 허가를 받았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네덜란드로의 망명을 신청했다. 대회 뒤, 코르치노이가 공동 우승한 영국의 토니 마일스에게 ‘정치적 망명’(political asylum)의 철자를 써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한동안 네덜란드에 살다가 1978년 중립국인 스위스에 정착해 이후 40년 동안 그곳에 살았다. 망명 뒤 그는 소련에 남겨진 아내와 아들에게 자유를 달라는 탄원서를 썼다. 그의 아들이 마침내 소련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망명 뒤 6년이 지나서였다.
코르치노이는 중년의 나이를 지난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나갔다. 에 따르면 그는 60살에 세계 챔피언 도전자 결정전 준준결승에 진출했다. 74살 때 캐나다 퀘벡 오픈에서 우승했고, 75살엔 스페인 바뇰레스 대회에서 우승했다. 동년배인 다른 소련 동료들과 달리, 그는 60살 이상만 출전하는 세계 시니어 챔피언십 대회에 나가기를 거부했다. 마침내 마음을 바꿔 2006년 이 대회에 나갔을 때, 그는 무패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2012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그는 ‘경기’로서 체스는 다시 두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시뮬’(simultaneous exhibitions·그랜드마스터 등 높은 수준의 기사 한 명이 여러 명의 기사, 주로 아마추어나 청소년들과 대국하는 행사)에 열정적으로 참여했고, 2015년에는 휠체어에 탄 채 79살의 독일 그랜드마스터 볼프강 울만과 대국을 하기도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시니어 대회에선 무패 행진</font></font>코르치노이는 말년에도 자기비판적 태도를 유지했다. 전문가들은 그가 한 번 잘못된 것으로 판명난 플레이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특유의 회복력과 투지, 심리전 기술로 5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거의 모든 체스 세계 챔피언과 대국한 경험을 쌓은 드문 인물이었다. 체스 전문 매체 의 프레데릭 프리델은 코르치노이의 체스에 바친 삶에 관한 DVD (2005)에 담긴 그의 말을 전했다.
“나의 첫 상대 중에는 19세기에 태어난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53년에 나는 그랜드마스터 레벤피시와 경기를 했는데 그는 1889년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 이제 일주일쯤 뒤 오슬로에 가는데, 거기서 나는 망누스 칼센과 대국을 할 예정이다. 그는 레벤피시보다 101년 늦은 1990년에 태어났다. 나는 내가 여섯 세대에 이르는 사람들과 체스를 두어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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