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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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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인권운동가의 긴 투쟁

1960~70년대 정치테러 난무하던 이탈리아의 정치 격변기
시민불복종운동 펼치며 새로운 정치 참여 방법 제시한 마르코 판넬라
등록 2016-06-02 16:06 수정 2020-05-03 04:28
AP 연합뉴스

AP 연합뉴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뒤 70여 년간 이탈리아에는 수십 개의 내각이 들어섰다. 1948년 공화제 출범 이후 기독교민주당 연립정권이 40여 년의 장기 집권에 성공했으나, 군소 정당 난립, 당내 파벌 간 알력 싸움 등으로 1996년까지 내각이 55차례 바뀌는 등 정치적 혼란 속에 있었다.

마르코 판넬라(사진)는 정치적 혼란기의 한가운데에서 1955년 ‘급진당’을 공동설립했고, 오랫동안 이 당을 이끌며 급진주의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판넬라와 급진당은 전후 이탈리아 사회의 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거리의 선동가였다. 판넬라의 운동은 당시만 해도 크게 뒤처져 있던 여성, 동성애자, 재소자,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인권 수호를 비롯해 대마초·안락사·낙태의 합법화, 군비 축소, 핵에너지 사용 중단, 사형제 반대 등 현재까지도 논쟁적인 다양한 진보적 이슈들을 아울렀다.

이혼 반대를 반대한다

특히 1970년대 이혼법 투쟁은 판넬라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만하다. 당시 이탈리아 사회는 엄격한 가톨릭주의로 이혼을 금지하고 있었다. 다수당인 기독교민주당과 이탈리아사회운동당 등 신파시스트당은 이혼을 허용하는 이 법안에 반대했으며, 공산당과 사회당 역시 적극적인 찬성에 나서지는 않았다. 정치사회 체제 개혁 욕구가 분출하던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선 이혼 허용에 대한 대대적인 논쟁이 벌어졌는데, 판넬라의 이혼법안 발의가 이 모든 논쟁의 시발점이었다. 그는 이혼법의 국회 내 논의를 촉구하기 위해 단식투쟁을 벌였고, 결국 1975년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59%의 찬성으로 이탈리아인들은 이혼의 자유를 얻게 됐다.

이탈리아의 역사적인 급진파 정치인, 이탈리아의 이혼과 낙태 합법화를 이끈 ‘괴짜’ 인권운동가 마르코 판넬라가 지난 5월19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6.

그는 폐암과 간암으로 투병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탈리아 일간 온라인판은 그의 죽음을 알리며 “이탈리아의 얼굴을 변화시킨 인물과의 작별”이라는 헤드라인을 걸었다.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는 그를 “자유의 사자”라고 칭하며 애도를 표했다.

판넬라는 1930년 5월2일 이탈리아 중부 아브루초의 테라모에서 태어났으며,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졸업 뒤 변호사와 기자로 일했다. 1955년 이탈리아자유당에서 떨어져나와 새롭게 만들어진 급진당 창립에 참여했다. 급진당은 이때부터 작지만 강한 정당으로, 부패한 이탈리아 정치 기득권과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에 도전해왔다.

판넬라는 1960~70년대에 급진당의 얼굴이자 사회운동의 리더로 유명해졌다. 그는 이혼 합법화을 비롯해 낙태·대마초 합법화, 사형제 폐지, 사냥(총기소유)금지법 등 논쟁적인 사안과 관련해 10여 차례 국민투표를 이끌어냈다. 또한 1990년대 초 순수 비례대표제 폐지, 이탈리아 내 핵발전 폐기 등 성공적인 운동의 선두에 있었다. 시민권을 지지하는 활동에 힘입어, 1976년 판넬라를 비롯한 급진파들은 최초로 의회에 입성할 수 있었다. 판넬라는 1976년부터 1994년까지 이탈리아 하원의원을 지냈고, 1979년부터 2009년까지 유럽의회 의원을 지냈다.

에 따르면 이탈리아 언론은 오랫동안 그를 ‘괴짜’로, 급진당은 ‘돈키호테적’이라는 말로 묘사하곤 했다. 판넬라는 ‘정치적 쇼’에 능숙한 베테랑 운동가였다. 그의 ‘비폭력’ ‘시민불복종’ 시위는 전통적 관습에서 벗어나 있어 이목을 끌었다.

교황과 절친했던 무신론자

판넬라는 오랜 정치생활 동안 수많은 단식투쟁을 했다.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은 1970년대 이혼과 낙태 허용을 요구하기 위해 벌인 단식투쟁이었다. 이혼법 투쟁 당시 그는 하루 3잔의 커피와 비타민으로 78일을 버텼다. 그는 최근까지도 단식투쟁을 벌였는데, 2007년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이 처형된 뒤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며 단식투쟁에 나섰고, 2011년 81살로 교도소 과밀 수용에 반대하며 벌인 단식투쟁은 석 달간 이어졌다.

그는 장황한 연설과 극적인 연기로도 유명했다. 1995년 판넬라는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로마의 나보나 광장 한복판에서 거리의 사람들에게 공짜로 대마초를 나눠주는 시위를 벌이다 체포됐다. 이탈리아의 불법 마약 정책이 마피아에게 이익을 주고 있다며 대마초 합법화를 주장하는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한번은 선거캠페인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에 반대하는 시위로 14만8천달러를 거리의 시민들에게 뿌렸고, 교도소의 열악한 환경에 저항하며 벌인 단식투쟁 중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소변을 마시기도 했다.

폭력적인 정치테러가 난무하던 정치적 격변기, 그의 변칙적 시위들은 정치 참여 방법에서 이탈리아인들에게 새로운 감각을 제공했다. 는 “많은 이들이 그와 급진당이 정치적 혼란기에 유용한 안전밸브 역할을 했다고 여긴다”고 썼다.

‘시민의 자유’ 수호자였던 그는 시민의 권리를 탄압하는 동유럽 공산주의 정부를 극렬히 비난했으며, 초기 유럽연방주의자 중 한 명으로 유럽 통합에 힘쓴 이탈리아의 유명 정치가 알티에로 스피넬리 등과 함께 유럽연합(EU)의 탄생을 위한 개혁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판넬라는 무신론자였고, 이탈리아 사회 내 문제에 관여하는 바티칸 교황청에 맞서 싸우는 반교권운동에 평생을 바쳤지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최근 들어서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1979년 부활절 주일, 판넬라는 8천여 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로마 성베드로 광장에 모였다. 광장에선 수많은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부활절 축복이 이뤄지고 있었다. 판넬라를 비롯한 ‘비신도’들은 기아에 시달리는 전세계 아이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려고 이곳에서 행진을 벌였다. 이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관중을 향해 “특별히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어려움에 처한 어린아이들”을 돌봐달라고 간청했다. 이들의 시위에 암묵적으로 동의를 표한 셈이었다.

등 외신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판넬라의 생일에 자신의 책을 선물로 보냈고, 2014년 판넬라가 교도소 환경 개선을 주장하며 단식투쟁을 벌일 때 단식을 중단하라는 설득 전화를 직접 걸기도 했다. 바티칸 대변인 페데리코 롬바르디 신부는 판넬라가 반교회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을 무척 좋아했으며, 재소자의 인권 옹호 등 인권 문제와 관련해 교황과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다고 전했다.

판넬라에게는 구식 자유주의 문화와 민주적 급진주의가 공존했다. 급진적 인권운동에 앞장선 그는 자유시장주의자였고, 국가 부채 증가에 반대했으며, 복지국가에 비판적이었다. 전통적 좌우 이념의 스펙트럼 안에 위치짓기 힘든 인물로 지지자들에게는 ‘탈이념적’이라는 평가를, 반대자들에게는 ‘냉소주의자’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1980년대 이탈리아 사회당 당수였던 베티노 크락시 전 총리와 동맹을 맺는가 하면, 1994년과 1996년 선거에서는 중도우파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지지했다. 2006년에는 다시 로마노 프로디가 이끄는 중도좌파 연립정부에 참여했다.

영국 는 이에 대해 “판넬라는 이렇게 함으로써 기득 정당과 기업들의 지배적 위치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면서 “이 선택들은 이탈리아를 더 현대적이고 인간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해 그가 벌여온 긴 투쟁의 일부일 뿐이었다”고 썼다.

탈이념적 혹은 기회주의자로 평가

판넬라는 결혼한 적이 없다. 그는 2010년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유족으로 그의 오랜 여자친구로 알려진 산부인과 의사 미렐라 파라치니가 있다.

이로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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