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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용 철퇴 막은 ‘폭스의 유령’

1910년대 ‘영화 궁전’ 지켜내고 역사 기념물로 남긴 멀티플렉스 대항자, 조 패튼
등록 2016-05-04 20:33 수정 2020-05-03 04:28
AP 연합뉴스

AP 연합뉴스

1910년대와 1940년대 사이 ‘종합예술’ 영화의 황금기. 미국 전역에는 마치 신전처럼 보이는 건축 양식의 대형 영화관이 수백 개 지어졌다. 그것은 ‘무비 팰리스’(영화 궁전)라고 불렸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에도 무비 팰리스가 몇 곳 있었는데 대부분은 사라지거나 멀티플렉스로 개조됐고, 지금까지 원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은 ‘폭스극장’이 유일하다. 지금 이곳은 영화 상영과 함께 콘서트, 뮤지컬, 발레 등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는, 고풍스러운 건축양식을 간직한 지역 명소로 남아 있다.

신전처럼 보이는 대형 영화관 ‘폭스’

폭스극장이 철거나 개조의 파도를 피해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70년대 극장이 철거될 위험에 처했을 때, 많은 시민이 극장 지키기 운동에 나섰다. 이 그룹을 이끈 작은 체구의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당시 막 폭스극장의 기술감독이 된 조 패튼(Joe Patten)이다. 극장은 살아남았고, 1976년 건축적인 고유함을 인정받아 미국 역사 기념물로 등재됐다. 이후 1979년 극장 이사회는 패튼에게 관리인으로서 극장 내 공간에 살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패튼은 이때부터 죽기 직전까지 37년 동안 폭스극장의 거대한 돔 바로 아래쪽에 만들어둔 자신만의 ‘펜트하우스’에 살면서 극장 구석구석을 살피고 관리했다.

‘폭스의 유령’(‘오페라의 유령’에 빗대어 지은 애칭)으로 널리 알려진 폭스극장의 산 역사 조 패튼이 지난 4월7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9. 'AP'에 따르면 그는 최근 뇌졸중으로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극장 쪽은 패튼의 사망 뒤 그가 살던 공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아직 정확한 계획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 그리핀 패튼은 1927년 2월9일 미국 플로리다주 레이크랜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와 삼촌은 이 지역에서 시장을 역임했고, 레이크랜드의 한 거리(‘패튼 하이츠 스트리트’)에는 그의 가족명이 붙어 있다. 어린 시절, 그는 교회에서 파이프오르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오르간 관리인이 올 때마다 유심히 관찰하며 이 악기의 작동 방식을 익혔다. 또한 극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필름 영사기 지식을 습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그는 미 해군에 입대해 위생병으로 일했다. 이때 패튼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병원에 엑스레이 장비를 설치하는 일을 했는데, 덕분에 각 도시에서 어린 시절 좋아했던 극장과 파이프오르간을 만날 수 있었다.

패튼이 평생 인연을 맺게 될 폭스극장을 처음 만난 것은 종전 뒤인 1946년 애틀랜타를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극장의 정교한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패튼은 2008년 애틀랜타 역사센터의 도시지역사 분야 큐레이터 돈 루니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내가 본 극장 중 가장 흥미롭고 아름다운 극장이었다”('ArtsATL')고 말했다. 거대한 돔과 탑, 무어 양식의 아치, 카펫, 정교한 조각과 마무리 장식…. 무엇보다 극장 내부에는 4678석의 객석 위로 밤하늘처럼 보이는 검푸른 빛의 천장이 펼쳐져 있는데, 거기에 구름과 빛나는 별들이 박혀 있어 마치 야외 공연을 보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폭스극장의 명물인 거대한 극장용 파이프오르간인 ‘묄러 파이프오르간’ 역시 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이후 1960년대 초반 애틀랜타로 이주했다.

기금 모금으로 철거 막아내

패튼이 본격적으로 폭스극장에 관여한 것은 파이프오르간 때문이다. 저명한 덴마크 출신의 오르간 제작자 묄러가 제작한 이 오르간은 4개의 건반과 3622개의 파이프로 이뤄져 있으며,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극장용 오르간이다(그래서 별칭이 ‘마이티 모’다). 패튼이 처음 애틀랜타로 이주했을 때 마이티 모는 관리가 안 돼 연주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는 1963년 지인들과 함께 오르간을 수리해 복원하는 일을 하겠다고 자원했다. 그는 10개월에 걸쳐 오르간을 복원한 뒤, 5년간 무대 전기 기사로 일했고, 이후 1974년 극장의 총기술감독이 되어 2004년까지 일했다.

불행히도 이즈음 폭스극장은 철거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1929년 문을 연 폭스극장은 당시 전국적으로 지어진 5개의 ‘폭스사’ 체인 대형 극장 중 하나였다. 원래 종교단체의 신전으로 건축된 건물을 폭스사가 임대해 호화 영화관으로 개조했다. 한때 황금기를 누렸지만, 1970년대 들어 쇼핑몰과 멀티플렉스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위기에 처했다. 백인 중산층이 교외로 이주하면서 시내 영화 관객은 줄었고, 교외의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인기를 끌었으며, 영화 배급 방식도 변화하고 있었다.

1974년 미국의 통신사 AT&T의 지역 본부 ‘서던 벨’은 폭스극장 근처에 새 오피스 빌딩을 짓고 있었다. 이들은 극장을 허물고 이 자리에 자사 빌딩의 주차장을 지으려 했다. 건물 밖에는 이미 크레인과 철거용 철퇴까지 설치된 상황이었다. 폭스극장을 사랑하던 시민들은 철거 반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패튼은 이 캠페인에 앞장섰다. 패튼은 같은 해, ‘애틀랜타 랜드마크’라는 비영리단체를 조직해 극장 인수와 복원을 위한 기금 모금에 나섰다. 결국 애틀랜타 랜드마크는 1975년 6월 극장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고 오늘날까지 이 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철거의 철퇴를 피한 뒤, 패튼은 황폐해진 폭스극장의 복원 작업을 이끌었다. 그는 2010년 'AP'와의 인터뷰에서 “이 극장의 모든 것이 원래 디자인된 대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 그게 나의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덕분에 오늘날 폭스극장은 1929년 처음 열었을 때와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1979년 극장 이사회는 패튼의 노력에 대한 보답으로, 빈 창고와 사무실 공간을 평생 임대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패튼은 자비를 들여 이 공간을 개인 주거용 공간으로 개조하고, 고향 집에서 가져온 골동품 가구들로 채워놓았다. 그는 이곳에서 살 수 있는 특권을 “절대적인 기쁨”('ArtsATL')이라고 말했다. 침실의 어떤 문은 객석 꼭대기의 과거 조명 설치 공간과 이어져 있었다. 그는 은밀한 개인 좌석인 이곳에서 오랫동안 수많은 공연을 보았다.

패튼은 고전적인 것을 사랑했으며 정확하고 꼼꼼한 성격의 공학적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배관부터 조명, 무대 와이어 장치에 이르기까지 극장의 면면을 꿰고 있었다. 건물 구조가 손바닥 안에 있어 이 문에서 저 통로로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었던 그는 마치 출몰하는 유령처럼 보였다. ‘폭스의 유령’이라는 별명은 여기서 비롯했다.

그는 앤티크 자동차에도 깊은 애정을 가졌다. 1937년식 롤스로이스 팬텀3, 1941년식 캐딜락 60 스페셜 등 6대의 클래식카를 구입해 스스로 복원했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관련 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최근인 2008년까지도 고향인 레이크랜드에서 열리는 클래식 오토쇼에 참여하곤 했다. ‘레이크 미러 클래식 오토 페스티벌’의 설립자 포드 W. 히콕 3세는 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정말 신사였고, 그 자동차들을 워낙 오랫동안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라면 모든 부위의 세부적인 사항까지 잘 알았다”며 “그는 같은 정도의 세심함과 고집으로 폭스극장의 일을 대했다”고 말했다.

패튼은 1996년 폭스극장을 또다시 살려냈다. 그는 이른 새벽 다락에서 불이 난 것을 감지하고 재빨리 화재신고를 했다. 건물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던 그는 소방관들이 정확한 위치에 최대한 빨리 도착할 수 있도록 안내해 피해를 줄였다.

평생 극장에서 머물다 떠나

2010년 패튼은 자신이 살려내고 보존하는 데 평생을 바친 극장으로부터 퇴거 요청을 받았다. 공식적 이유는 건강상 안전 문제였다. 패튼은 자신의 집에 계속 거주할 권리를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소식이 알려지면서 많은 시민이 패튼을 지지하는 시위에 나섰고, 수천 명이 ‘세이브 조’ 페이스북 페이지에 모여들었다. 결국 2011년 극장은 그가 평생 이 건물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합의했다. 그는 죽기 10일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폭스극장은 패튼의 사망 이후 성명을 발표해 헌신적인 관리인으로서 그가 보낸 세월에 경의를 표했다. “패튼의 유산은 앞으로도 미래 세대가 폭스극장을 경험하는 동안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이로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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