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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첫 퓰리처상 반납 끌어낸 ‘진짜 기자’

<워싱턴포스트> 사내 옴부즈맨으로 1면 기사 허구 밝혀낸 전직 언론인 빌 그린
등록 2016-04-14 16:36 수정 2020-05-03 04:28
<워싱턴포스트> 인터넷 화면 갈무리

<워싱턴포스트> 인터넷 화면 갈무리

“지미는 8살이고, 3세대째 헤로인 중독자다. 조숙한 꼬마는 연노랑색 푸석한 머리에, 부드러운 갈색 눈망울을 하고 있다. 암갈색 팔뚝은 깡마른 채다. 아기처럼 부드러운 피부에는 주삿바늘 자국이 주근깨처럼 박혀 있다. …아이는 5살 적부터 중독자로 살아왔다.”

26살 기자를 ‘스타덤’에 올린 8살 지미 이야기

1980년 9월28일치 1면에 실린 ‘지미의 세계’란 제목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마약을 거래하는 엄마의 동거남을 통해 지미는 헤로인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지미의 생부는, 외할머니의 동거남이었다. 성폭행을 당해 아이를 낳은 엄마는 집을 나와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부터 지미까지, 3대가 마약에 취해 위태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게다. 어린 지미에게도 꿈이 있다. 약에 취해 퀭한 눈으로 쉼없이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아이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11살이 되면 마약 거래 일로 돈을 벌고 싶다”고.

문장은 유려했다. 표현은 생생했다. 기사 곳곳에 배치된 전문가의 설명과 현실을 짚는 정보는, 미국 워싱턴 일대 흑인 공동체가 처한 상황의 위중함을 잘 드러내줬다. 2256개 단어의 이 기사는 이듬해 미국 언론계 최고 권위인 퓰리처상을 받았다. 기사를 쓴 스물여섯 재닛 쿡 기자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빌 그린의 삶이 절정을 맞은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그린은 1924년 11월11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에서 태어났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자그마한 종자가게도 운영하는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고향에서 고교를 마친 그린은 공군에 입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유럽으로 날아간 그는 이탈리아 전장에서 제15공군 소속으로 정찰기를 탔다. 군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49년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 채플힐 교정을 졸업했다. 그의 집안에서 대학을 졸업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의 첫 번째 직업은 기자였다. 고향의 석간신문 에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한 그는 와 등지를 옮겨다니며 편집자로 잔뼈가 굵었다. 하지만 언론인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린은 1957년 미 공보국(USIA)으로 자리를 옮겨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방글라데시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주재 대사관에서 공보 책임자로 일했다. 1963년 워싱턴으로 복귀한 뒤에는 공보국 부국장 특별 보좌관에 선임됐다. 이어 유인 달착륙 프로젝트인 ‘아폴로 계획’이 한창이던 미 항공우주국(NASA)으로 자리를 옮겨 공보 업무를 맡기도 했다.

그의 세 번째 직업은 대학 교직원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를 지낸 테리 샌퍼드가 1970년 동부 명문 듀크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했다. 샌퍼드는 그린을 이 학교 대외협력 국장으로 끌어왔다. 듀크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그린은 기사 작성법 등을 강의하는 한편, 현직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방문연수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등 체계를 잡아나갔다. 수많은 전·현직 언론인과 교분을 쌓을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안식년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왔다. 사내 옴부즈맨으로 일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게 뭐하는 일이냐’고 물었다. 독자의 대표자가 돼주면 된다고 하더라. 어떤 제한도 없이 말이다.”

그런데, 지미는 ‘실존하지 않았다’

그린은 2003년 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가 로 출근하기 시작한 건 1980년 8월 초부터다. 그로부터 몇 주 지나지 않아 ‘지미의 세계’ 기사가 나갔다. 기사는 반향이 컸다.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극적’이란 내부 평가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럼에도 벤저민 브래들리 편집국장을 비롯한 간부진은 이 기사를 퓰리처상 후보작으로 추천했다. 1981년 4월13일 퓰리처상 위원회는 재닛 쿡을 피처 스토리 부문 수상자로 선정했다. 문제는 그다음에 불거졌다. 매리언 배리 당시 워싱턴 시장과 버텔 제퍼슨 경찰국장이 나섰다. 사회복지사와 수사관으로 전담팀까지 꾸려, 8살 지미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기사의 무대인 도시 남서부 흑인 공동체를 이 잡듯 뒤졌다. 아이를 찾아내 재활치료를 받게 하고, 가족의 삶을 일으켜 세워주겠다고 다짐했다.

어디서도, 지미를 찾을 수 없었다. 한번 생긴 의심은 쉽게도 커져갔다. 배리 시장은 “지미는 없다. 실존 인물이 아니라, 여러 아이들을 모델로 만들어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편집국에도 비상이 걸렸다.

쿡 기자는 기사의 ‘진실성’을 강변했다. 말썽은 엉뚱한 곳에서 터져나왔다. 그가 로 옮겨오면서 내세웠던 학력과 경력에서 허점이 발견된 게다. 여러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던 그에게 브래들리 국장이 프랑스어로 물었다. 쿡 기자는 질문을 알아듣지 못했다. 브래들리 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24시간을 줄 테니, ‘지미’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점을 입증하라.”

같은 시각, 그린도 강도 높은 취재를 하고 있었다. 쿡 기자의 입사 전형에 관여했던 모든 이들을 만났고, ‘지미’ 기사가 지면에 나가기까지 전 과정에 걸쳐 탐문을 벌였다. 한편, 여러 간부진과 대화를 이어가던 쿡 기자는 결국 “지미도, 지미의 가족도 실존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그는 1981년 4월15일 사표를 제출했다.

는 즉각 퓰리처상을 반납했다. 퓰리처상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쿡이 퓰리처상을 받은 것도 부당하지만, 쿡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것도 부당하다.”

1981년 4월19일 는 1면에서 시작해 4개 면에 걸쳐 그린이 쓴 진상보고서를 실었다. 2256단어짜리 기사의 배후를 밝혀 적기 위해 1만8천여 단어가 사용됐다. 퓰리처상 선정 소식이 전해진 뒤 6일 만의 일이다. 는 지난 3월30일치에서 그린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40명이 넘는 간부들과 인터뷰를 했다. 그 모든 정보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당시엔 타자기를 사용했다. 쉬지 않고 28시간 타자기에만 매달렸던 기억이 난다.”

‘기사의 신빙성’ 기준 마련

브래들리 국장은 곧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사주인 도널드 그레이엄이 이를 반려했다. 그린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뿐 아니라, 미국의 모든 언론이 저널리즘의 윤리와 책임성에 대한 단호한 기준 마련에 나섰다.

그린은 보고서의 결론에서 이렇게 밝혀 적었다. “만약 어느 기자가 편집자에게 기사의 신빙성을 입증하기 위해 등장인물의 신원을 공개할 수 없다면, 그 기사는 지면에 실려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의미 있는 뉴스가 지면에 실리지 못하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년에 걸친 폭풍 같은 안식년을 마감한 그린은 조용히 듀크대학으로 돌아갔다. 그는 1986년 대외협력 담당 부총장으로 정년을 맞았다. 그해 말 총장을 지냈던 샌퍼드가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그린은 선임 보좌관으로 3년을 더 공직에서 일했다.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 그는 어떤 공식 직함도 맡지 않았다. 그저 매달 한 차례 절친한 친구들과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는 것에 만족하며 한적한 노년을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빌 그린은 지난 3월28일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의 자택에서 수술 후유증 등으로 조용히 세상을 등졌다. 향년 91.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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