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창립자 스티브 잡스는 1972년 경제적 이유로 대학을 중퇴했다. 공식 등록학생이던 기간은 6개월에 불과했다. 이후 그는 18개월 동안 캠퍼스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도강을 일삼았는데, 그중 캘리그래피(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 수업이 있었다. 잡스는 후일 애플컴퓨터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서체가 바로 이 수업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맥(Mac)은 아름다운 활자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다. …만약 내가 그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맥컴퓨터는 지금의 다중활자체나 비례적으로 공간이 있는 폰트(가변폭 폰트)들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2005년 미국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연설)
이 수업의 교수는 당시 리드대학의 캘리그래피 전성기를 이끌던 로버트 팔라디노였다. 그는 엄격한 봉쇄 속에서 수행하는 가톨릭 관상 수도회인 트라피스트회 수도자 출신이었다. 수도원의 침묵 속에서 서체 예술을 익히고 연마했으며, 수도회를 떠나 많은 학생들에게 고요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가르쳤다.
“미래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시끄럽게 될 유명인이 수년 동안 침묵의 서약을 했던 수도사와 함께 공부했다는 것은 팔라디노 신부의 캘리그래피만큼이나 정교한 우연이었다.”() 봉쇄수도원의 필경사이자 성직자, 캘리그래피의 거장이었던 로버트 팔라디노가 지난 2월26일 미국 오리건주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
<font size="4"><font color="#008ABD">잡스를 글씨의 세계로 이끈 수업</font></font>
팔라디노 신부는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리드대학에서 1969년부터 은퇴한 1984년까지 캘리그래피를 가르쳤다. 그는 붓·펜·깃·잉크 등 낡은 도구들로 이뤄지는 글씨의 역사, 구조, 미학에 대한 고풍스러운 세계로 학생들을 이끌었다. 에 따르면 그는 학생들에게 “언제든 글씨를 쓸 때는, 뭔가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을 쓰라”고 말하곤 했다.
당시 리드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앞서가는 캘리그래피 수업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리드대학의 캘리그래피 교육 프로그램은 잡스 외에 많은 저명한 예술가, 서체 디자이너를 길러냈다. 잡스는 2005년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당시 학교 분위기를 떠올리며 “캠퍼스 곳곳에 있는 모든 포스터, 서랍마다 붙은 모든 라벨이 아름답게 손으로 쓰인 캘리그래피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 매력에 이끌려 팔라디노 신부의 수업을 들었고, 이 경험은 후일 그와 그가 이룩한 ‘애플 왕국’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는 세리프(Serif)와 산세리프(San serif) 서체에 대해, 글자와 글자의 조합 간 여백의 다양성에 대해, 그리고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배웠다. 그것은 과학이 포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잡스는 이어 말했다. “10년 뒤, 우리가 첫 매킨토시 컴퓨터를 디자인할 때, 비로소 모든 것이 내게로 되돌아왔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맥의 디자인에 담았다.”
잡스가 팔라디노 신부에게서 얻은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캘리그래피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사고방식’이었다. 는 팔라디노 신부의 캘리그래피가 “글자들이 다정하게 서로를 달래며 자리를 잡아 단어를 형성하고, 단어들이 차례로 조립되어 하나의 의미 있는 글을 형성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리스어, 히브리어, 로마어 등 어떤 언어의 문자를 쓰든 “팔라디노 신부의 모든 획은 명상적인 신중함과 역사적인 충성서약을 수반했으며, 단 한 차례의 움직임도 낭비하지 않았다.”
잡스는 2년 뒤 팔라디노 신부를 다시 찾아와 자신이 지금 부모님의 차고에서 컴퓨터라는 걸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 문자의 활자체와 관련해 나와 상담하고 싶어 했다.” 팔라디노 신부는 2011년 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그가 내 그리스 문자 서체를 컴퓨터에 담을 것인지, 단지 시작하는 시점에만 사용할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친절했고 우리는 좋은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가 말하는 것에 완전히 무지했기 때문에, 그는 내게 ‘컴퓨터’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 잡스는 이후 1976년 애플을 공동창립했다. 팔라디노는 1984년까지 리드대학 강단에 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글씨에 ‘사고’를 담다 </font></font>로버트 요제프 팔라디노는 1932년 11월5일 미국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이탈리아 출신의 석공이자 건축가였다. 팔라디노는 17살 때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초기에는 이 수도원의 필경사 밑에서 캘리그래피 훈련을 받았다. 이후 오리건주의 다른 수도원으로 자리를 옮겨, 이곳에서 서체 예술에 대한 본격적 연마에 들어갔다. 그는 수도원의 과수원 일을 하면서 필경사, 성가대 지휘자, 제본 기술자로 지냈다. “고요한 수도원에서, 표지판(사인)은 쓸모가 있다.” 그는 2011년 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1958년 사제로 임명됐다. 그러나 1962~65년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수도원 생활에 빠져 있던 그를 불편하게 했다. 교회의 대대적인 현대적 개혁이 이뤄졌는데, 여기에는 수도원의 침묵을 해제하고, 그레고리안 성가를 지역 토착음악으로 대체하고, 라틴어로 획일화돼 있던 미사를 각국의 현대 언어로 바꾸어 봉헌하는 것 등이 포함됐다.
1968년 그는 수도원을 떠났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헌신할 수 없었다. 그것은 더 이상 신과의 결합에 대한 나의 갈망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완전히 현혹돼 있지 않다면, 그런 삶의 방식을 좋아할 수는 없다.”()
그는 이듬해 리드대학에 출강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엔 캘리그래피, 스톤커팅, 예술사, 붓글씨, 레터링 등을 더 연구하기 위해 아이오와주 세인트앰브로스대학으로 떠나, 그곳에서 저명한 캘리그래퍼이자 고문서학자였던 에드워드 카티치 신부와 사제의 연을 맺기도 했다. 팔라디노는 신부직을 내놓고, 포틀랜드 심포니의 클라리넷 연주자 캐서린 홀버슨과 1969년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두었다.
1984년 퇴임 뒤, 팔라디노는 아내와 함께 농장으로 이주해, 양을 기르며 살았다. 아내가 1987년 사망하자, 1995년 팔라디노는 다시 신부로 돌아가 오리건 교구에서 활동했다. 그는 한동안 오리건주의 의사면허증에 들어가는 모든 글씨를 쓰기도 했다. 리드대학뿐 아니라 포틀랜드주립대학, 퍼시픽노스웨스트칼리지, 메릴허스트대학 등 다양한 곳에서 캘리그래피를 가르쳤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평생 컴퓨터 사용 안 한 컴퓨터 서체 스승</font></font>팔라디노는 1990년대 리드대학의 캘리그래피 부활을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1년 ‘캘리그래피 이니셔티브’를 시작한 리드대학의 스테파니 스나이더는 “팔라디노는 리드대학이 1980년대 캘리그래피 프로그램을 없애자 깊이 낙담했으며, 커뮤니티의 노력으로 되살렸을 때 많이 기뻐했다”며 “우리로선 그가 돌아와 다시 강단에 선다는 것 자체가 놀랄 만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로버트는 고요함, 느려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거기에는 현대 미국 문화의 정신없는 소음 속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치가 있었다.”
팔라디노 신부는 후일 자신이 이룩한 그 무엇보다, 주로 스티브 잡스의 캘리그래피 스승으로 기억될 거라는 걸 알았다. 그 스스로 그 사실에 대해 “흥미로운 일”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생애 단 한 번도 컴퓨터를 가져보거나 사용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글자들은 컴퓨터 화면에서 너무 못생겨 보인다”고 말했다.
이로사 객원기자※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font color="#C21A1A">▶ 바로가기</font>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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