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그를 다룬 기사의 제목은 ‘20년째(톈안먼 사태 이후) ‘연옥’에 갇힌 후야오방’이었다.
후야오방(胡耀邦)은 1915년 11월20일 중국 남부 후난성 마오쩌둥 생가 인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때 중국 공산당에 들어갔고, 공산당을 절멸 위기에서 살려낸 1934~35년 대장정에 참여했다. 1957년에는 공산주의 청년단의 제1서기가 됐지만 1966년 문화혁명 때 숙청됐다. 10년 만인 1975년 복권됐고 1980년에는 덩사오핑에 의해 중국 공산당을 이끄는 총서기로 발탁됐다.
후야오방의 부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덩샤오핑을 잇는 지도자로 주목받던 그는 1986년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방관했다는 명목으로 강경파에 밀려 다시 실각했다. 중국 공산당은 후야오방에 대해 “정신적으로 오염됐고 자산 계급 자유화에 반대하는 당을 배척했다”는 정치적 꼬리표를 붙였다.
1989년 4월 심장마비로 그가 죽자, 1976년 마오쩌둥 사망 이후 최대 규모인 약 20만 명의 대학생·시민들이 톈안먼 광장에 모여 철야 애도 시위를 했다. 그의 사망은 1989년 톈안먼 사태(정치 개혁을 요구한 베이징 대학생들의 시위를 군에서 강경 진압)를 불러온 도화선으로 꼽힌다. 이후 중국에서 후야오방은 톈안먼 사태와 함께 금기어 중 하나가 됐다.
그랬던 후야오방에 대해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시 복권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중국 곳곳에서 그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 은 후야오방을 두고 “위대한 무산계급의 혁명가, 정치가, 우리 군의 걸출한 정치사업가, 오랜 기간 당의 중요 지도 직위를 맡았던 탁월한 영도자”라고 평했다.
그러나 10년 전인 탄생 90주년 때도, 6년 전인 톈안먼 사태 20주기 때도 그랬다. 그의 복권 이야기는 중국 정부의 ‘뜨거운 감자’ 였지만, 뜨거운 감자는 누구도 껍질을 까지 않았다.
후야오방의 아들 후더화는 올해 초 “(당) 중앙의 기념 활동은 후야오방의 정치적 과오를 지적한 것에 대한 평가를 뒤집는다는 뜻과는 다르다. 그것은 단지 그를 그리워한다는 뜻일 뿐”이라고 했다. 후더화는 “이는 그가 좋은 사람이었는지 나쁜 사람이었는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당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며 기념행사가 아닌 정식 문건으로 후야오방이 복권돼야 한다고 했다.
무르익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써온 이들이 앞선 결정을 뒤집을 가능성은 낮다. 천다오인 상하이정법대교수는 “당국자들이 역사를 자신들의 정치적 필요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보고 있다. 관영 매체가 모범 당원으로서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을 뿐 톈안먼 민주화 운동과의 연관성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는 전했다.
역사가 하나의 당과 하나의 기관에 의해서만 기록되고 전해질 때 사람에 대한 ‘진실된 시각’은 존재하기 어렵다. 후야오방이 학생들을 위한 지도자였는지, 정신적으로 오염된 지도자였는지 진실은 점점 판단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역사에 대한 다양한 시각 대신 하나의 시각만 고수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주도하는 이들의 편의대로 기록된 역사는 사람을 연옥에 가둔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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