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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노 나가요시(細野長良)는 1883년에 태어나 1950년에 생을 마친 일본 법조인이다. 왕정복고 이후 군국주의로 나아가던 일본에서 사법권 독립을 위해 노력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18년 도쿄 공소원(현 고등재판소) 판사가 되었다. 이후 히로시마 공소원 원장을 거쳐 1946년 2월, 제23대 일본 대심원(현 최고재판소) 원장으로 취임해, 마지막 대심원 원장을 지냈다. 1950년 1월1일, 6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본 최고 훈장 중 하나인 훈일등서보장을 받았다.
이와 같이 호소노의 생애는 법조인으로서는 가히 성공적이라 할 만하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 판사가 된 뒤, 사법부 수장까지 올랐던 인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최고의 자리에 오른 호소노는 그 자리와 걸맞지 않게 평탄치 못한 말년을 보낸다.
호소노 인생의 수난은 ‘도조 연설 사건’에 대한 반발로 시작됐다. 도조 연설 사건이란, 1944년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도조 히데키가 일본 내 전국 재판소 장관 회동에서 “전쟁을 원활히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판결을 내리면 정부는 비상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위협한 사건이다. 군부정권이 노골적으로 사법권의 독립성을 훼손한 것이다.
당시 히로시마 공소원 원장이었던 호소노는 법조계에서 유일하게 도조에게 반박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도조 군부정권이 ‘불온사상’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등 강력한 독재를 행했기 때문에 법조계 역시 정권에 완전히 눌려 있던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호소노와 같이 “정부는 사법을 감독하는 기관이 아니다”라며 도조에게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이 의견서 제출로 호소노는 당연하게도 ‘높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으나, 반대로 자신을 지지하는 법조계 인사들도 얻었다. 사법권 독립을 지지하는 재판관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1945년 패전 이후, 사법기관의 ‘개혁’을 맡은 사법대신 이와타 주조에게 “도조에게 항의한 사람은 호소노 한 사람”이라며 호소노를 대심원 원장으로 추천한 이도 있었다. 결국 이 추천으로 대심원 원장이 되었으니, 그의 투쟁이 결실을 맺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법조인들을 지나치게 비판한 나머지, 그를 따르던 재판관들과도 급속도로 멀어졌다. 결국 권력에 아첨하는 무리와 홀로 싸워야 했던 호소노는 사법권 독립을 위한 전투에서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유일한’ 인물이 가지는 한계였다.
결말은 좋지 않았지만 약 70년 전, 군국주의가 극에 달했던 일본에서도 사법권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살벌한 와중에도 그랬다. 7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법조계는 어떠한가. 목숨을 바쳐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법권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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