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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지교’가 품은 칼

아메노모리 호슈
등록 2016-01-31 00:16 수정 2020-05-03 04:28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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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는 “과거 아메노모리 호슈 선생의 외교 철학인 ‘성신교린’(誠信交隣)처럼 한국과 일본은 신의와 성실로 사귀어야 한다”고 말했다. 16년 뒤 2015년 11월, 이번엔 박근혜 대통령이 “일본에도 한-일 관계는 진실과 신뢰에 기초해야 한다는 성신지교(誠信之交)를 말씀하신 선각자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일 정상회담 자리에서 아베 신조 총리에게 건넨 말이었다. 박 대통령이 이름을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성신지교’라는 말을 통해 다시 한번 ‘아메노모리 호슈’라는 검색어의 순위를 올렸다.

아메노모리는 1668년에 태어나 1755년에 사망한 에도시대 외교관이다. 의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의학을 공부하다 유학자가 되기 위해 에도로 상경했다. 1685년에는 당대 최고 유학자였던 기노시타 준안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이후 스승의 추천으로 쓰시마번(대마도)에서 일하게 되는데, 1702년에는 부산 초량왜관에 머물기도 했다. 이때 조선어를 수준급으로 배우고 돌아와 외국어에 능통한 재주를 살려 쓰시마번의 외교를 담당한다. 조선통신사가 12차례 일본을 방문하는 동안 가장 많이 접촉한 인물이 아메노모리였다. 다수의 저서를 남겼는데, 대조선 외교 지침서인 (交隣提醒)이 대표적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 언급한 ‘성신지교’도 이 책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성신지교’를 말하기 전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당시 쓰시마번의 상황이다. 쓰시마는 지형이 험준해 농경지가 총면적의 4%에 불과했다. 에도시대에는 멧돼지 때문에 문제가 많아 퇴치를 담당하는 번사(藩使)를 두기도 했다. 외부 식량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했다. 부산과는 거리가 50km밖에 되지 않아 본국보다 왕래하기 쉬웠다. 대조선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에 나타난 아메노모리의 모습이다. 은 조선통신사로 파견된 제술관 신유한의 기행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통신사가 호코지에 방문하길 거부하자 아메노모리가 분노하여 칼을 꺼내려 했다고 한다. 호코지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에 세운 절이다. 앞서 쓰시마에서 마찰이 생겼을 때도 그는 조선통신사를 위협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고 한다. 아메노모리에게는 쓰시마번과 막부의 이익만 좇는 모습이 있었다.

9년 뒤 1728년 아메노모리는 을 저술했고, 조선과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고, 진실로 대하는 것”을 강조했다. 신유한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성신’이란 말로 잘 포장된 그의 외교 ‘능력’은 300여 년이 지나 한국 대통령 두 명의 말에서 언급됐다.

외교에 명분과 실리 둘 다 있으면 최상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리다. 외교를 할 땐 자국의 실리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은 300여 년 전 일본의 한 지방 외교관도 잘 알고 있었다. 왜 박근혜 대통령과 한국 외교부만 모르는지 알 수 없다.

길주희 객원기자·인권연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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