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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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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번역가가 나쁜 대통령보다 덜 문제적”

희곡작가이자 번역가이자 헝가리 대통령이었던 아르파드 괸츠, 민주 헝가리의 첫 대통령으로 10년 재임 뒤 퇴임 지지율이 86%였던 ‘엉클 알피’
등록 2015-11-05 16:50 수정 2020-05-03 04:28

1990년 9월23일 미국 일간 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아르파드 괸츠: 철강 노동자, 변호사, 희곡작가, 번역가, 헝가리의 대통령.’ 당시 막 소련 공산주의 정권에서 벗어나 민주 헝가리의 첫 자유선거에서 대통령이 된 아르파드 괸츠의 인터뷰 기사다.
기자는 의문을 품었다. ‘왜 이토록 많은 작가와 지식인들이 동유럽 혁명의 선두에 섰지?’ 1989년 철의 장막이 무너진 직후인 당시 서구에는 미국의 (아버지) 조지 부시, 영국의 마거릿 대처, 독일의 헬무트 콜이 있었다. 그들은 어느 모로 보아도 ‘작가’이거나 ‘지식인’은 아니었다. 반면 동구권에서는 괸츠를 비롯해 체코의 첫 민주 대통령으로 뽑힌 희곡작가 바츨라프 하벨이 명성을 떨쳤다.
“전문 정치인이 준비될 때까지”
괸츠는 답한다. “독재정권 아래서, 인간 범주에 대한 이해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은 작가와 예술가뿐이다. (다만) 이들은 인간 문제의 진정한 전문가나 기술자는 아니다. 그들은 ‘숙련 노동자’로 불려야 할 이들일 뿐이다.”
아울러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게도 지난 2~3년간 딜레탕트(예술·학문을 비직업적으로 애호하는 사람)들이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우리는 완전한 전문 정치인이 소수나마 준비될 때까지, 이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임시적으로) 권한을 갖고 있는 것뿐이다.”
딜레탕트들이 정치판의 중심에 나선 것을 보면, 세계 정세가 급변하던 1990년 즈음이 예외적 시기이기는 했다. (의) 기자는 그의 말에 대해 “그 주장은 화려하게 자기 과장적이었고, 동시에 매력적으로 자조적이었다”고 평한다. 그는 자신이 정치적 ‘아마추어’라는 사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새로운 정치에 부응할 수밖에 없었던 창의적 인물임을 천명한 것이다.
그랬던 민주 헝가리의 첫 대통령, 희곡작가이자 번역가이며, 나치즘과 소련의 공산주의 독재에 대항해 싸운 아르파드 괸츠가 지난 10월6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

헝가리의 전 대통령 아르파드 괸츠가 2012년 2월10일 그의 9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집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발코니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REUTERS

헝가리의 전 대통령 아르파드 괸츠가 2012년 2월10일 그의 9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집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발코니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REUTERS

괸츠는 1990년 첫 자유선거로 구성된 의회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43년 동안의 공산 통치가 끝난 직후였다. 1995년 재선에 성공해 2000년까지 10년 동안 대통령을 지냈다. 헝가리는 의원내각제를 택하고 있어, 실권은 총리에게 있고 대통령은 의례적 직무를 수행하는 상징적 원수다. 괸츠는 그럼에도 헝가리가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괸츠는 1922년 2월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뒤인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공동전선으로 징집됐으나 부대를 탈영해 나치와 싸우는 무장 학생저항군에 가담했다.

종전 뒤 그는 당시 다수당이던 독립소지주당에 가입해 1948년까지 이라는 청년 정치주간지의 편집자와 당 서기장으로 일했다. 1948년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쫓겨나, 용접공과 배관공, 금속세공사 등을 전전했다. 1952년에는 농업대학에서 농업과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사회적 변란이 그의 학업을 다시 방해했다.

괸츠는 1956년 정치로 돌아온다. 소작농들의 정당인 헝가리소작농연합에서 일하다가, 헝가리 혁명을 맞는다. 헝가리 혁명은 스탈린식 전체주의에 맞서 민주적 권리를 되찾으려 학생, 노동자, 시민이 일으킨 반소련 혁명이었다. 한때 공산당이 개혁파 인사인 임레 너지를 총리로 지명하는 등 시민들의 개혁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듯했다. 너지는 정치범 석방, 비밀경찰 폐지, 소련군의 부다페스트 철수를 발표하고 헝가리의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와 중립화를 선언했다. 그러나 결국 소련은 무력으로 너지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후 다시 친소 정권이 세워졌고, 괸츠는 다른 반체제 인사들과 함께 1957년 5월 혁명에 가담한 반역죄로 체포됐다.

이듬해 열린 공개재판에서 괸츠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의 죄목에는 너지의 글을 국외로 밀반출하는 것을 도운 일도 포함돼 있었다(이 글은 당시 서구권에서 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너지는 혁명의 주동자로 1958년 부다페스트의 감옥에서 처형됐다.

하루 10시간 번역해도 주머니엔 ‘5달러’

투옥돼 있는 동안 괸츠는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1963년 그는 정치범 사면으로 석방된다. 석방 뒤 그는 6년간 감옥에서 익힌 영어로 프리랜서 번역 일을 시작했다. 이후 1970년대까지 반체제 지식인들과 연계를 맺고 지하 문학작품을 출판하는 등 민주화운동을 이어갔다.

1965∼90년 그는 100권 이상의 영어권 소설과 저작들을 헝가리어로 번역했다. J. R. 톨킨의 3부작을 비롯해 존 골즈워디의 연작, 윌리엄 골딩의 등이 그 시작이었다고 하는데, 하나같이 엄청난 분량이다. 이외에도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업다이크, 애거서 크리스티, 수전 손태그, 앨리스 워커 등 수많은 작품들을 번역했다. 그는 조지 오웰과 윌리엄 포크너의 번역물로 유수의 번역상을 받았으며, 포크너의 소설 가 자신에게 “가장 커다란 도전”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괸츠는 그 자신이 희곡작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했다. 자신의 작품은 헝가리어로 썼다. 소설 (1974), 에세이 (1980), 희곡 (1979) 등 수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후기 작품 중 유명한 것은 초현실극인 과 단편집 (1991)인데, 대부분 작품의 중심 주제는 사회가 부과한 도전에 대항하는 개인의 투쟁과 관련한 것이었다. 그는 1983년 요제프 어틸러 문학상을 비롯해 프레미오 메디테라네오상 등 많은 문학상을 받았다.

번역과 글쓰기를 하는 동안에도 삶은 여전히 고되었다. 하루 10시간씩 번역 일을 해야 겨우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었다. 그는 “나의 글쓰기에 필요한 시간을 (번역에) 빼앗겼다”()고 말하곤 했다. 1982년 작가 콘퍼런스 참여로 미국 여행을 허가받았을 때, 그의 주머니에는 고작 5달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정치권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1988년 5월 자유민주연맹을 공동 창립하면서부터다. 그는 이 시기 헝가리작가연합의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

1989년 헝가리의 공산주의 통치가 막을 내리면서, 괸츠의 정치 인생은 조금 변화한다. 이듬해 첫 자유 총선이 치러졌고, 그의 당인 자유민주연맹은 선거에서 완패했지만, 그는 가까스로 의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의회는 선거를 통해 그를 민주 헝가리의 첫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는 10년간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헝가리 국민에게 괸츠는 ‘엉클 알피’로 불렸다. 특유의 자연스러움과 친밀함, 비판에 열린 융통성 있는 태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지금까지도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꼽힌다. 대통령 임기를 마친 2000년 그의 지지율은 86%에 이르렀다.

그는 민주 헝가리의 첫 총리였던 보수파 연합의 언털 요제프와 대립하기도 했다. 1991년 요제프는 ‘정치적 균형감의 부족’을 이유로 국영 라디오와 TV 방송사 사장을 해고하려 했다. 괸츠는 정부의 언론 탄압을 규탄했는데, ‘월권행위’를 괘씸히 여긴 의회가 그를 불신임하기도 했다. 언론 자유의 수호자로 나선 그의 행동은 좌파의 지지를 얻었고, 우파에게는 ‘서구 이익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정부 언론 탄압 규탄하고 EU 가입 초석 다져

임기 동안 그는 미국, 영국 등 서구권 국가를 비롯한 많은 국가들과 교류했다. 헝가리의 유럽연합(EU)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기 첫해인 1990년엔 한국을 공식 방문하기도 했다. 1993년 대전 엑스포 개최 때도 비공식 방한했다.

딸인 킹거는 2006~2009년 헝가리의 첫 여성 외교부 장관을 지냈다. 2007년 외국의 현직 외교부 장관으로는 처음으로 개성공단을 방문했다. 괸츠는 공직을 떠난 뒤에도 자선 활동에 헌신했다. 줄곧 장난스러운 위트로 널리 사랑받았다. 에 따르면 그는 2000년 와의 인터뷰에서 번역가와 대통령으로서의 고초를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다.

“확실한 건, 나쁜 번역가는 나쁜 대통령보다 문제를 덜 일으킨다는 점이다.”

이로사 객원기자 goorr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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