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탈 애커만(사진)은 ‘유럽의 거장’으로 불리는 벨기에 출신의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여성주의적이고 실험적인 영화의 개척자였으며, 그녀의 영화는 종종 롱테이크를 통해 여성의 내면에 대한 신중하고 세심한 관찰을 보여주었다.
지난 10월5일 샹탈 애커만이 6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자살로 알려졌다. 애커만의 친구들은 그녀가 지난해 어머니의 죽음 뒤 줄곧 힘들어했다고 밝혔다. 우울증으로 입원한 뒤 프랑스 파리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 불과 10일 전이었다.
그녀의 예상 밖의 죽음은 영화계에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AP'에 따르면 토론토 국제영화제 쪽은 그녀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이자 아티스트 중 하나였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한 “대담하고, 고유하며, 타협하지 않고, 언제나 급진적이었던 애커만은 영화사에 대혁신을 일으켰다”며 “새로운 형식의 언어와 함께 끊임없이 영화의 경계를 확장했다”고 말했다.
관습적인 플롯도, 대사도 없는 영화들샹탈 애커만은 예술가로서의 그 중요성에 비해 대중에게 덜 알려진 작가다.
애커만의 대표작 (1975)은 “영화 역사상 ‘여성영화’의 첫 걸작”()으로 평가된다. 그녀는 25살 때 이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3시간45분의 긴 러닝타임 동안, 과부인 한 여성이 음식을 준비하고, 집안일을 하고, 집으로 오는 남자들에게 돈을 받고 몸을 파는 모습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담담히 따라간다. 단순한 반복은 조용히 충격적 클라이맥스를 향해 간다.
유명한 시퀀스는 주인공 딜망이 아주 오랫동안 감자를 깎는 장면이다. 보고 있으면 집 안에서 단조롭고 고통스럽게 반복되는 ‘여성적’ 삶의 내면을 느낄 수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전통적으로 ‘죽은 시간’이라 불렸던 시간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의 필자 리처드 브로디는 “이런 이미지들은 여성들의 집 안에서의 삶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여성 개인의 삶이 공공 정치의 장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샹탈 애커만은 1950년 6월6일 벨기에 브뤼셀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나탈리아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였으며, 외조부모는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 애커만은 15살 때 장뤼크 고다르의 (1965)를 본 뒤 영화를 만드는 게 실험적이고 개인적인 작업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초기부터 일상에서 분출될 수 있는 폭력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 작품인 13분짜리 흑백 단편영화 (1968)는 그녀가 벨기에 영화학교를 중퇴한 뒤인 18살에 만든 영화다. 영화는 그녀가 부엌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을 비춘다. 그러다 그녀가 가스버너 근처에 머리를 기대는데, 이후 화면은 캄캄해지고 방은 폭발한다.
그녀는 영화학교를 중퇴한 뒤, 1972년 미국 뉴욕으로 갔다. 그곳에서 조나스 메카스, 이본 라이너, 마이클 스노, 앤디 워홀 등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세계에 몰두했다.
이후 그녀는 관습적인 플롯도 대사도 없는, 다양한 실험적인 영화를 찍는다. 1972년작 에서는 65분 동안 엘리베이터를 타는 장면이 계속되고, (1977)에서는 미국 뉴욕 거리를 비추는 장면 위로 벨기에의 어머니로부터 온 편지를 읽는 애커만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1976년작 에서 그녀는 성적 정체성을 특정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주인공을 연기했다. 영화에는 그녀가 여성인 연인과 긴 시간 섹스를 하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트럭 운전사인 남성과 사무적인 성적 만남도 갖는다. 영국 일간 에 따르면 트럭 운전사 역할을 맡았던 배우 닐스 아르스트럽은 당시 애커만을 이렇게 회고했다. 애커만이 어느 늦은 저녁 그에게 찾아와, 자신에겐 돈도 대본도 없고, 단지 그에게 제안할 한 가지 역할이 있다고 말했다. “언제 찍으면 되냐”고 그가 묻자,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고 말했고, 그를 스태프들이 트럭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비디오 설치 등 장르 넘나들어불안과 소외는 애커만의 영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에 따르면 그녀는 “본질적인 것들은 말하지 않은 채 남겨두는 방식”을 선호했다. 유대인과 홀로코스트와 관련한 트라우마 역시 비록 표면 아래에 숨겨져 있기는 했지만, 애커만 영화의 지속적인 주제였다. 그녀는 2007년 ‘누군가의 신발끈 옆을 지나 텅 빈 냉장고로 걸어 들어가기’라는 영상 설치 작업을 독일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외할머니의 10대 시절 일기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었다.
유작이 된 가장 최근작 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그녀의 어머니 나탈리아(2014년 사망)에 관한 비디오 에세이다. 이 영화는 지난 8월 스위스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되었으며, 바로 지난주 뉴욕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다.
영화는 브뤼셀에 있는 어머니의 아파트에서 촬영되었다. 병든 어머니와 그녀 사이의 대화가 주를 이룬다. 그녀의 어머니는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결코 말하지 못하고, 영화는 줄곧 그 ‘불가능’의 주변을 맴돌기만 한다. 그녀는 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이런 식의 작업이 될 거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로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이 영화는 종종 ‘개인적’이라 일컫는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개인적인 작업이었으며, 그녀에게 고통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는 그녀의 실험적인 많은 다른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야유와 갈채를 동시에 받았다.
애커만이 동시대의 다른 감독들에 비해 영화계에서 ‘작가’ 감독으로서의 정돈된 위치를 획득하지 못한 것은, 그녀의 다방면에 걸친 작업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실험적인 에세이 영화, 비디오 설치 등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넘나들었다.
애커만은 상대적으로 주류 영화에 가까웠던 쥘리에트 비노슈와 윌리엄 허트 주연의 정신분석학적 코미디 (1996)을 만들었으며,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를 각색한 (2000)과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을 각색한 (2011)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녀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는데, 공산화 이후 동유럽의 모습을 담은 (1993), 미국과 멕시코 접경지역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을 관찰한 (2002),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한 아파트에 머물며 목적 없이 보이는 것을 기록한 (2006) 등이 그것이다.
애커만은 비디오 설치 작업을 병행했으며, 한 편의 희곡과 두 편의 자전적 소설을 출간했다. 2011년엔 뉴욕시티칼리지에서 방문 강사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기도 했다.
홀로코스트도 그녀의 지속적 주제의 영화평론가 J. 호버먼은 그녀를 장뤼크 고다르 감독이나 독일의 거장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에 비유했다. 호버먼은 그녀를 “그 세대 유럽의 영화감독 중 가장 중요한 감독”이라고 불렀다. 최근 예술영화계에서 추앙받는 클레어 드니, 아피찻뽕 위라세타쿤, 토드 헤인스 등의 영화감독들 역시 느리고 신중한 리듬, 공간을 관리하는 방식 등 다양한 면에서 애커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프랑스 일간 에서 토드 헤인스는 그녀의 대표작 에 대해 “영화라는 것을 상상할 때, 내가 생각하는 방식,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경험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이로사 객원기자 goorra@daum.net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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