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담 후세인의 입.’ 타리크 아지즈 전 이라크 부총리 겸 외교장관이 6월5일 중남부 나시리야에서 숨졌다. 한국군 서희·제마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afp>는 “사망 당일 오후 3시께 시내 후세인종합병원으로 실려왔으나 곧 숨을 거뒀다. 사인은 심장마비”라고 전했다. 향년 79.
직업도 생일도 같았던 사담 후세인
“1950년대 이라크는 후진적 왕정체제였다. 제국주의의 영향력도 여전했다. 대안은 세 가지였다. 공산주의와 서구식 민주주의, ‘아랍사회주의’로 불린 민족주의가 있었다. 아랍사회주의가 최선이란 점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국주의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진정한 독립과 아랍권의 단결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1957년 대학을 졸업한 아지즈는 아랍사회주의를 기치로 내건 바트당에 입당했다. 그가 ‘미카엘 유한나’(영어로 ‘마이클 존’)란 기독교식 이름을 버리고 ‘존엄한 길’을 뜻하는 아랍 이름 ‘타리크 아지즈’로 개명한 것도 그 무렵이다. 비슷한 시기 법대를 중퇴한 중부 티크리트 출신의 건장한 청년 한 명이 바트당에 입당했다. 아지즈보다 한 살 어린 사담 후세인이었다. 두 사람은 직업(교사)은 물론 생일(4월28일)까지 같았다.
이듬해인 1958년 부패한 왕정이 군사 쿠데타로 무너졌다. 그 배후에 바트당이 있었다. 정국을 장악한 카림 카심이 구성한 초기 내각 18명 가운데 12명이 바트당 소속이었다. 애초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주도하는 ‘아랍공화국연합’(UAR)에 가담하기로 했던 카심은 집권 이후 노선을 틀었다. 바트당이 카심 정권에 등을 돌린 이유다.
바트당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공산당과 손을 잡았던 카심은 1963년 2월 암살됐다. 바트당은 군부 실력자 살람 아리프와 의기투합해 재차 정권에 다가섰다. 하지만 불과 9개월여 만에 아리프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폭풍 같은 시대였다. 일찌감치 당내에서 두각을 나타낸 아지즈는 이 무렵 당 기관지 (혁명)의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1966년 4월 아리프가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숨졌다. 그의 동생 라흐만이 권력을 승계했다. 1967년 6월 제3차 아랍-이스라엘 전쟁(6일전쟁)이 끝난 뒤, 중동 정세가 요동쳤다. 이듬해 7월 바트당 지도자 하산 바크르가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번엔 단독 집권이었다. 대통령 겸 혁명통제위원회(RCC) 의장에 오른 바크르는 사촌이자, 열혈당원인 사담 후세인을 부통령에 임명했다. 아지즈도 ‘날개’를 달았다.
분쟁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자마자
1974년 공보장관에 임명된 아지즈는 후세인 곁에서 정세분석과 대외관계를 총괄했다. 그로부터 3년 만에 아지즈는 최고권력기구인 혁명통제위 위원으로 선임됐다. 기독교도 출신치고는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1979년 7월 고령을 이유로 바크르가 퇴임하면서 후세인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아지즈는 부총리에 올랐다.
1980년 4월 바그다드 중심가 무스탄시리아대학교 부근에서 아지즈 일행을 겨냥한 수류탄 투척 사건이 벌어졌다. 현 이라크 집권당인 시아파 이슬람다와당이 벌인 일이었다. 후세인 정권은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는 한편, 시아파 국가인 이란을 배후로 몰아세웠다. 8년여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의 서막이었다. 1980년 9월 이라크는 해묵은 영토분쟁을 빌미로 그예 이란 국경을 넘었다.
미국과 이라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983년 12월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의 중동특사가 바그다드에 도착했다. 외교장관 겸직을 시작한 아지즈가 그를 후세인에게 안내했다. 두 사람은 90분가량 대화를 나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은 이라크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했다. 두 나라는 이듬해 11월 외교관계를 복원했고, 아지즈는 백악관에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났다. 그의 중동특사도 그곳에 있었다. 도널드 럼즈펠드다.
1988년 8월 전쟁이 끝났다. 천문학적 전비로 이라크는 빚더미에 올라 있었다. 후세인 정권은 아랍 각국에 부채 탕감을 호소했다. 남쪽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쿠웨이트가 앞장서 반대했다. 이라크는 원유 증산에 골몰하는 한편, 석유수출국기구(OECD) 쪽에 감산을 통한 유가 인상을 요청했다. 쿠웨이트는 되레 증산을 했다. 유가는 바닥세를 유지했고, 두 나라 사이에 긴장감이 치솟았다.
1990년 7월25일 후세인은 에이프릴 글래스피 바그다드 주재 미 대사를 만났다. 는 1990년 9월23일 당시 면담에서 글래스피 미 대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보도했다. “본국으로부터 이라크와 더 나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미국은 아랍 국가 간 분쟁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나갈 것이다.” 이라크군이 남쪽 국경을 넘어 쿠웨이트로 진격한 것은 그로부터 8일 뒤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즉각 이라크에 대한 가혹한 경제제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의약품과 식량 등 인도적 물품 수급을 제외한 모든 금융·무역 활동을 금지한 게다. 이듬해 1월 미국이 본격적으로 군사 개입에 나섰다. 이른바 ‘사막의 폭풍작전’이다. 전쟁은 두 달이 채 안 돼 막을 내렸고, 미국과 이라크는 적대국이 됐다. 미 의회는 1998년 ‘이라크해방법’을 통과시키고, ‘레짐체인지’를 정책기조로 공식화했다. 파국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향인 모술 일대는 IS의 수중에
2001년 9·11 동시테러 이후 미국의 위협은 노골화했다. 아지즈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워싱턴에서 진군의 북소리가 절정에 이른 2003년 2월 유럽 순방길에 교황청에 들른 아지즈는 과 만나 “미국이 끝내 침공을 감행한다면 ‘재앙의 문’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해 3월20일 끝내 전쟁이 시작됐다. 침공 한 달여 만에 미군 탱크가 바그다드에 진입했다. 비밀리에 후세인과 작별인사를 나눈 아지즈는 4월24일 미군과 접촉을 시도했다. 가족이 요르단행 미군기에 탑승한 것을 확인한 그는 제 발로 감옥으로 향했다.
고혈압과 당뇨, 심혈관계 질환과 우울증이 말년의 그를 괴롭혔다. 그는 2010년 8월 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 후회의 말을 내뱉는다면, 사람들은 나를 기회주의자라고 할 것이다. …지혜는 자유의 일부다. 내가 자유의 몸으로 진실을 기록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내 가장 친한 친구’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9월 아지즈의 고향인 모술 일대가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 수중에 떨어졌다. 기독교도의 탈출 행렬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미국은 이라크군 지원을 위한 군사자문단 파병을 서두르는 한편, 최근까지 모두 4400여 차례나 공습을 단행했다. 소용없었다. IS는 지난 5월 서부 안바르주 주도 라마디까지 장악했다. 바그다드가 지척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6월10일 미군 군사자문단 450명 증파를 명했다. 이로써 이라크 주둔 미군은 3550명까지 늘었다. 2011년 말 철군 이후 최대 규모다.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inhwan@hani.co.kr</pbs></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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