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임’은 지난 겨울을 타이 북부 치앙마이에서 보냈다. 여러 해 겨울 없이 살아온 나도 섭씨 14~15℃까지 내려가며 유난히 ‘혹독했던’ 추위를 놓치고 싶지 않아 치앙마이로 떴다. 화이트 성탄까진 아니지만 덥지 않은 성탄만 해도 웬 떡이냐 싶었다. 그때 임의 발크림을 보았던 게다. 임은 ‘G’ 브랜드의 얼굴 크림을 발등에 문질러대고 있었다. 흡수되기를 거부하는 크림은 발등에서 하얗게 맴돌았다. 한국에서 화장품을 챙겨오지 않아 얼굴용으로 하나 구입했는데 바르는 순간 “부끄러워서 나갈 수가 없었”단다.
“아깝잖아. 발에라도 발라야지!”
임이나 나나 멜라닌 색소가 넉넉히 생성된 탓에 겨울 없는 동남아 사람들의 평균 피부색과 별반 다르지 않다. 보통의 타이 여성들도 그 크림을 바른다면 임의 발등처럼 화이트닝 효과를 볼 게 분명했다.
타이에서 ‘화이트닝’ 문구 없는 화장품을 찾는 건 뽕 없는 브라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2012년 타이 환경단체인 어스(EARTH)는 시중에 판매되는 얼굴 크림을 샘플조사해 화이트닝의 ‘비법’ 중 하나인 수은 함량을 조사한 바 있다. 조사 제품의 21%가 수은 과다로 드러났다. 보고서는 21% 안에 들지 않았던 임의 발크림에 대해 수은 함량 0.05ppm 이하로 추정된다고 적었다. 0.05ppm 크림도 바르면 하얗게 뜨는 판에, 수은 함량 9만9070ppm으로 최고치를 보인 ‘FC Rice Milk’ 크림은 ‘하얀 가면’이라도 하나 씌워줄 것 같다. 그럴지도 모를 ‘수은크림’들은 수랏타니·깐라신·사뭇쁘라깐 등 구릿빛 피부가 보편적인 지방이나 공단 도시에서 조사용으로 구매된 거였다. 피부색이라는 표상이 사회계층이라는 표의로 직행하는 게 화이트닝의 기호학이라면, 구릿빛 동네의 화이트닝 야망이 강렬하게 드러난 타이는 이 학계를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영국과 네덜란드 합작사인 유니레버의 타이 브랜드 찌뜨라(Citra)는 ‘깨끗하고 부드럽고 생기 있는 피부 찾기’ 공모전을 개최했다. 교복 차림으로 자사 제품 ‘펄화이트 UV 보디로션’을 들고 찍은 사진을 보낸 여대생 중 ‘하얀 피부 학생’을 골라 상금 10만밧(약 340만원. 2013년 10월 환율 기준)을 주겠다는 것이다. 공모전 홍보 영상에는 하얀 피부와 구릿빛 피부 여대생을 대비시켜 ‘하얀 피부는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한다’는 메시지까지 담았다. 논란이 계속되자 찌뜨라는 결국 공개 사과하고 공모전을 접었다.
그보다 한 달 전인 9월 던킨도너츠 타이 지사는 ‘숯 도넛’이라는 신상품을 출시하며 검은 메이크업에 진분홍 입술을 바른 모델을 선보였다. 도넛 팔겠다고 검은 피부 인간을 ‘숯덩이’로 만들어버린 이 광고 역시 인종주의 논란을 거치며 사과와 광고 철수로 마무리됐다.
간헐적으로 불거지는 스캔들에도 타이 사회의 화이트닝 광풍은 건재하다. ‘바기나 화이트닝’ 제품이 호응을 얻는가 하면 액면 그대로의 화이트닝은 아니지만 젖꼭지를 핑크색으로 바꿔준다는 제품까지 동네 화장품 가게 선반에 놓여 있다. 그러다 최근 화이트닝 바람이 잠시 멈칫한 적이 있다. 6월 말 치러진 ‘미스 타일랜드 2014’에서 구릿빛 피부미인 매야가 1등으로 뽑힌 것이다. 매야는 ‘미인대회 최초의 구릿빛 피부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편견을 깨고 싶었다는 게 수상 소감의 요지인데, 글쎄다. 과연 그 편견이 얼마나 깨질지는 좀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비록 타이 국내법은 수은 함유 제품을 전면 금지하고,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역시 수은 함유 제품의 거래를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타이는 동남아 화이트닝의 종주국이 되었고, 타이발 ‘수은크림’은 동남아 국경을 넘나드는 건 물론 방글라데시까지 진출했다. 언어와 인종과 종교로 사분오열된 아시아가 한 줄로 서는 깃발이 있다면 그건 바로 화이트닝이리라. 그 현상을 부추긴 주요 변수가 (백인보다 하얀) ‘코리안 스타일 피부’를 밤낮으로 보여주는 ‘한류’라는 건 부인하기 어려운 ‘새하얀’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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