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일이다. 막내동생이 대학을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말로만 듣던 군대 ‘영장’이라는 게 나왔다. 영장이 나온 뒤부터 집안 분위기는 티가 나게 숙연해졌다.
“워메 저 에린(어린) 게 가서 뚜드러(두들겨) 맞지는 않을랑가 몰라.”
죽으라고 사지에 보내는 것도 아닌데, 엄마는 한 번씩 긴 한숨을 쉬며 군대 가는 ‘에린 막둥이’ 걱정에 가슴이 타들어갔다. 막내동생은 유난히 내성적이고 유순했던지라 명령과 강압, 그리고 남자들의 온갖 험한 막말이 난무할 정글 같은 군대에서 온전히 버텨낼지 좀 걱정이 된 건 사실이다.
사지 멀쩡하고 집안 역시 사촌에 팔촌을 탈탈 털어도 동네 말단 이장직조차 하는 친척 한 명 없어서 막내동생은 어떻게 손 한번 써볼 여력도 없이 현역 군인으로 징집당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시위 진압이 잦은 전경으로 말이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동생은 나름 군대생활을 편안히(?) 마치고 제대했다. 거기엔 누나인 나의 역할도 한몫했다고 자신한다.
어느 날 휴가를 나온 동생은 나에게 간절한 부탁을 했다. 같은 부대 안에 자기보다 계급이 높은 상병인가 병장인가 하는 선배 군인이 있는데, 어느 날 그가 “너희 중에 시집 안 간 예쁜 누나가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했다는 것. 그 선배 군인의 파워가 부대 안에서 상당했던지라 누구든 그 ‘끈’을 잡기만 하면 그가 제대할 때까지는 편안한 군대생활이 보장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동생은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어서 “누나가 한 명 있는데 그럭저럭 괜찮다”고 ‘뻥’을 쳤다고 한다.
내가 쓴 편지에 비교적 ‘상태 괜찮은’ 사촌 여동생의 사진을 동봉했다. 감쪽같이 속은 그 선배 군인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고 우리는 그가 제대할 때까지 ‘펜팔 연애’를 했다. 덕분에 동생은 큰 사고 없이 비교적 편안하게 군대생활을 할 수 있었고, 식사 배급량에서도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군대를 갔던 사촌동생은 (군대 간 게) 광화문 사거리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을 붙들고 3일 밤낮을 ‘시일야방성대곡’을 한다 해도 분이 안 풀린다고 했다. 사촌동생은 말을 유난히 더듬거렸다. 특히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더 더듬거려서 한마디 하는 게 남들 백마디 하는 것만큼 힘들었다. 의사는 그 상태로는 정상적인 군대생활을 하는 것이 ‘어쩌면’ 힘들 수 있다며 신체검사와 면접에서 분명히 무슨 ‘조치’가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사촌동생은 멀쩡하게도 현역 등급을 받았다. 그 사연이 포복절도할 정도다. 신체검사와 면접 전에 의사가 써준 말더듬이 증세 소견서를 참고 자료로 제출했는데, 면접 당시 면접관이 눈을 부라리며 이렇게 묻더라는 것. “너 말 더듬는 거 맞아? 거짓말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그 위세와 표정의 강압에 짓눌려서라도 사촌동생은 말을 더 더듬거렸어야 하는 게 정상인데 어찌된 일인지 자기도 모르게 말이 ‘술술’ 나오더라는 것. “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현역 군인에 ‘당첨된’ 말더듬이 사촌동생의 군대생활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보다 더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강원도 전방에서 근무했던 사촌동생은 한겨울에 ‘목숨 바쳐서‘ 삽과 곡괭이를 들고 얼어버린 ‘똥둑간’을 전투적으로 파내던 모습이 상사의 ‘눈에 든 뒤’로는 말더듬이로 인해 심한 얼차려와 놀림을 받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나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다. 다행히 아빠 국적을 따라 중국 국적을 취득했기 때문에 군대에 보낼 걱정은 없다. 하지만 막 낳았을 때만 해도 국적 선택 문제로 적잖이 고민했는데, 한국에 있는 친·인척들과 지인들의 ‘한마디’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쳤어? 그런 걸 왜 고민해? 나중에 ×× 군대 보내고 싶어?”
얼마 전, 한국 군대에서 또 대형 사고가 터졌다는 뉴스가 들렸다. 사악한 마음이지만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비극적인 일이 벌어질 일이 없겠구나’ 하는. 오래된 일이지만 또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겠는가. 내가 만일 동생을 위해 ‘펜팔 연애’를 하지 않았고 사촌동생이 한겨울에 목숨 바쳐 ‘똥둑간’을 뚫지 않았다면 그들 역시 문제 혹은 관심 사병이 되어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일을 벌였을지.
박현숙 베이징 통신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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