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하루 종일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핑계 삼아, 또 그 음침하고 우울한 빗소리를 안주 삼아 혼자서 낮술을 퍼마시다 초저녁에 혼절한 일이 있다. 애주가에게 무릇 감성을 조금이라도 자극하는 ‘건수’나 ‘핑계’가 생기면 그날은 바로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술 당기는 날이 되는 법. 그날 나의 ‘주 신경’ 감성이 자극된 건, 비가 내리기도 했지만 한 가지 ‘비보’ 때문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중국 영화감독이자 장이머우 이후 6세대 중국 영화감독 중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왕취안안 감독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사흘 연속 성매매를 한 혐의로 구속됐다는 것이다. 그것도 유명 여배우인 아내가 미국 뉴욕으로 ‘일 보러’ 간 사이에 그같은 사고를 쳤다는 것.
딱히 그를 두둔할 이유도 없고 또 그러고 싶어도 ‘성매매 현행범’이라는 공표 사실이 워낙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그가 무슨 이유로 성매매를 했는지 알 바 아니고 오지랖 넓게 도덕적 비난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저 유능하고 역량 있는 한 영화감독이 참 어이없고 한심하게 몰락하는 모양새가 짠할 뿐이다. 그런데 뭔가 좀 수상하다.
그가 작업실에서 성매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찰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도 화대로 받았다는 지폐 뭉치가 담긴 성매매 여성의 가방까지 현장에서 촬영하고 그것을 온 언론에 공개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파파라치들이 왕 감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다가 우연히 현장을 목격했거나, 누군가 사전에 왕 감독의 성매매 사실을 알고 신고했을 가능성이 아니라면 대중 숙박업체도 아니고 밀폐되고 사적인 개인 공간에서 이뤄진 성매매 현장을 경찰이 ‘신의 투시력’을 발휘해 급습했을 리는 만무하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제보를 받고 현장을 덮쳤다고 한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술 한잔 마신 김에 좀더 불온한 상상을 하자면, 왕 감독은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거나 그의 일상생활이 ‘빅브러더’에게 감시되고 있었음에 과감히 ‘한 표’를 던지겠다. 지난해 중국의 유명한 사회운동가이자 인터넷 소셜 커뮤니티 등에서 통렬한 사회비판으로 큰 인기를 모았던 사회비판 논객 쉐만쯔 역시 왕 감독처럼 현장을 급습당해 성매매 혐의로 구속되었다. 사회의 온갖 부조리를 비판하고 고발하던 고상한 ‘사회비판분자’가 뒤로는 비도덕적 행위로 지탄받는 성매매를 했다고 하니 그를 신뢰하던 많은 중국인들이 얼마나 큰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을지 상상해보라. 덕분에 중국 당국에는 이것보다 더 좋은 호재는 없었을 것이다. 온갖 꼬투리를 잡아 그를 반체제 인사로 강제 감금하거나 잡아들여서 국내외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것보다 성매매 건수 하나로 영원히 ‘날려버렸으니’ 말이다.
반체제 인사는 아니지만 왕 감독 역시 ‘튀는’ 인물임이 확실하다. 그의 영화는 주로 빈곤계급과 소외계층을 다루고, 중국에서도 가장 황량하고 가난한 곳인 서부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최근에 개봉된 은 검열 당국에 의해 거의 절반 정도가 싹둑 잘려나갔다는 ‘소문’이 있다. 개봉된 나머지 절반 분량만으로도 전쟁과 기아, 권력의 이전투구가 판치는 비극적인 시대에 중국 민초들의 삶이 어떻게 굴절됐는지 잘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성매매라는 추악하고 부도덕한 행위로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그의 ‘꼴’이 조금 슬프기도 하고, 그를 장이머우 감독처럼 ‘벨벳 감옥’에 가두지 못해 그런 함정을 만든 게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비 내리던 그날, 초저녁에 혼절하기 직전 또 이런 취중 잡생각을 해봤다. 최근 골프장 캐디 성희롱 사건으로 망신을 당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만일 중국에서 원정 골프를 치다가 ‘그런 짓’을 하고 현장에서 발각됐다면 뭐라고 했을까? “아니, 저 아가씨가 한국에 있는 내 딸 같고 손녀처럼 귀여워서 그냥…. 우리 한국 골프장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고….”
그랬다면 지금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아마 중국 언론에 ‘한국의 거물급 정치인 변태, 성희롱죄로 현장에서 체포’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되고 한-중 양국 간 외교적 ‘변태’ 파장을 몰고 왔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가 왕취안안 감독처럼 ‘공정한’ 사법 처리를 받는다면 말이다.
박현숙 베이징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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