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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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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 상자 열리다

‘사막의 폭풍’이 초래한 거대한 후폭풍‘이슬람 대 세속주의’ 대결 점화시킨 1991년 알제리 내전
등록 2014-01-04 16:49 수정 2020-05-03 04:27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에 맞서 걸프전에서 병력을 구축하던 미국 주도의 다국적 연합군은 1991년 2월24일 쿠웨이트 탈환에 나서는 ‘사막의 폭풍’ 작전 지상전을 개시했다. 앞서 다국적군은 1월17일부터 한 달 넘게 공습을 가해 이라크의 사회기반시설을 파괴하고 이라크군의 작전능력을 무력화해놓았다. 다국적군은 압도적 병력과 화력으로 이라크군을 몰아냈다. 사담 후세인은 사흘 만에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 철수를 명령했고, 다국적군은 철수하는 이라크군을 쫓아서 이라크 영내를 넘어 바그다드에서 240km 떨어진 지역까지 진격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상전이 시작된 지 100시간 만인 2월28일 쿠웨이트 해방과 함께 휴전을 선포하고 작전 종료를 선언했다.

지상전 개시 100시간 만에 쿠웨이트 해방

한 ‘불량국가’의 일탈행위에 대해 미국의 주도로 35개국이 군사력을 모아 응징하는 걸프전은 <cnn>을 통해 전세계에 생중계되면서, 냉전 이후 미국의 일극체제를 상징하는 사건이 됐다. 독일 통일 등으로 동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소련에서 이탈하는 와중에, 그리고 소련 몰락의 전야에 벌어진 이 전쟁은 미국이 홀로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시작을 선포하는 듯했다. 하지만 사막의 폭풍 작전 종료 이후 벌어진 사태는 미국의 슈퍼파워 일극체제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그리고 냉전 이후 미국이 맞서야 할 상대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예고편이었다.
미국이 지상전 개시 사흘 만에 군사작전을 종료한 것은 결과적으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존속시키는 상황을 낳았다. 나중에 이는 두고두고 미국의 정책 실패라고 비판받았다. 당시 후세인 정권을 타도하지 못해서 2002년 이라크 전쟁의 불씨를 남겼다는 것이다. 2002년 이라크 전쟁 뒤 벌어진 결과를 보면, 미국의 당시 결정이 꼭 실수였다고만 할 수도 없다. 미국이 걸프전 때 후세인 정권을 군사적으로 타도할 수 있었겠지만, 그 뒤 상황은 2002년 이라크 전쟁 이후 벌어진 내전 상황을 10년 앞당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부시 당시 대통령과 그의 안보보좌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1998년에 쓴 회고록 (A World Transformed)에서 자신들이 후세인 정권을 군사적으로 타도하는 선택을 했다면 다국적군 동맹이 와해되고 불필요한 정치적·인명적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딕 체니 당시 국방장관도 “후세인을 쿠웨이트에서 축출하고, 대통령이 우리는 목적을 달성했고 이라크를 접수해서 통치하려는 문제에 발목이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결정을 한 것은 옳았다”고 밝혔다. 당시 이런 주장을 했던 체니는 10년 뒤 이라크 전쟁 추진의 주역이 되어, 미국을 이라크 수렁에 빠지게 한다.
또 미국이 걸프전 수습 때 불필요한 정치적·인명적 손실을 초래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사막의 폭풍 작전 종료 뒤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쿠데타나 민중봉기로 타도하려는 공작을 펼쳤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운영하는 라디오는 2월2일부터 남부 이라크에서 봉기를 촉구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2월15일에는 부시 대통령이 직접 방송에서 “유혈을 중단하는 또 다른 길이 있다. 즉, 이라크 군부와 이라크 국민이 자신들의 손으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강제로 하야시키고, 유엔 결의안을 준수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다”라고 노골적으로 쿠데타와 봉기를 부추겼다. 부시는 쿠웨이트를 탈환하고 휴전한 뒤인 3월1일에도 같은 내용의 연설을 내보냈다.
남부에서는 이라크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소외된 시아파가 주도하는 ‘이슬람다와당’ 및 ‘이라크이슬람최고위원회’와 탈영한 군인들을 중심으로 봉기가 일어났다. 북부에서도 독립을 추구하던 쿠르드족이 미국이 지원할 것임을 믿고 봉기에 나섰다. 이는 10년 뒤 이라크 전쟁에 이어지는 이라크 종파분쟁 등 내전의 씨앗이자 예고편이었다. 그러나 남부와 북부의 봉기는 여전히 후세인에게 충성하는 이라크군에 의해 철저히 분쇄됐고, 이들이 기대했던 미국의 지원은 오지 않았다. 후세인 정권은 화학무기까지 사용하며 잔인하게 봉기를 진압했다. 이 봉기로 걸프전 때보다 많은 8만~23만 명의 민간인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약 130만 명의 쿠르드족 난민 사태도 발생했다.

알제리 내전, ‘아랍의 봄’의 원형

걸프전은 이슬람 세계와 중동에 분쟁의 판도라 상자를 여는 계기였다. 그동안 아랍 세계 대 이스라엘의 분쟁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중동 분쟁에 아랍국가 사이의 분쟁, 아랍 권위주의 정권 대 민중, 수니파 대 시아파 등 이슬람 내부의 종파 분쟁, 아랍국가 내부의 다수민족 대 소수민족 분쟁을 더했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분쟁을 포괄하는 이슬람주의 대 세속주의 대결로 치달아갔다.
걸프전의 여파가 걸프 지역을 여전히 감싸고 있던 1991년 12월 알제리에서 치른 1차 총선에서 이슬람주의 정당 이슬람구국전선(FIS)이 압승하자, 집권 민족해방전선(FLN)은 이 선거를 무효화했다. 곧 군부가 정부를 장악하고 이슬람구국전선을 불법화했다. 알제리는 급속히 폭력 사태에 휩싸이며 내전으로 치달았다. 군부로 대표되는 세속주의 세력과 이슬람주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충돌한 이슬람 세계의 첫 내전이었다. 알제리 내전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했던 무자헤딘들이 본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한 첫 무대이기도 했다.
알제리 내전은 20년 뒤 ‘아랍의 봄’ 이후 이집트에서 벌어지는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대결의 원형이기도 하다. 알제리에서 군부가 나서서 총선을 무효화하고 이슬람구국전선을 불법화한 것은, 알제리 공무원위원회 등 세속주의 세력이 군부에게 “공화국을 구하라”는 연서명운동 등에 추동된 것이다. 20년 뒤 아랍의 봄 이후 집권한 이슬람주의 세력인 무슬림형제단과 그 정당인 자유정의당의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를 군부가 축출한 것도 세속주의 시민사회 세력의 촉구가 원동력이었다.
아프간 전쟁의 무자헤딘 출신을 중심으로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곧 무장 게릴라 단체를 결성했다. 1992년 초 이슬람무장운동(MIA)이 결성되고, 곧 이 단체 내에서 더 강경한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세력이 무장이슬람그룹(GIA)으로 분화돼 나왔다. 만수르 멜리아니와 아프간 무자헤딘 출신이 주축이 된 무장이슬람그룹은 지도부가 교체되면서 더 강경한 투쟁으로 치달아 민간인에 대한 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1994년 정부와 이슬람구국전선 사이의 협상이 고조되자, 무장이슬람그룹은 이슬람구국전선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무장이슬람그룹을 제외한 기존 이슬람주의 무장세력들은 이슬람구국군(AIS)으로 재편됐다. 무장이슬람그룹과 이슬람구국군 사이의 분쟁도 가열됐다.
내전은 잔인했고, 더러웠다. 군부정권의 잔인한 탄압, 이에 맞서는 이슬람주의 무장세력들의 과격성, 이를 조장하는 군부정권과 서방의 공작이 서로 맞물리며 잔학행위는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특히 이슬람무장그룹은 자신의 노선에 동조하지 않는 민간인에 대한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한 마을을 습격해 마을 주민들의 머리를 베어 효수하는 잔악한 학살이 반복됐다. 당시에도 이런 학살에는 군부정권의 공작이 작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는데, 2002년 알제리 내전이 끝난 뒤 이는 일부 사실로 밝혀졌다. 무장이슬람그룹의 일부 지도부는 군부정권의 프락치였으며, 무장이슬람그룹의 결성에 군부정권의 공작이 관여됐다는 것이 프랑스와 영국의 조사 결과 밝혀졌다. 이 공작에는 프랑스와 영국 정보기관도 관여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영국 정보기관도 개입한 더러운 내전

1997년 들어 학살 사태는 최고조에 달했고, 각각 최대 800여 명과 400여 명이 숨진 라이스 마을과 벤탈라 학살은 전세계에 충격을 줬다. 임신부는 배가 갈리고 아이들은 토막 나거나 벽에 던져져 숨졌고, 남성 성인들은 손발과 목이 잘려나갔다. 당시 국제앰네스티 등 인권단체는 이 마을들의 몇백m 안에 정부군 병영이 있었는데 정부군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실제 정부군에서 이탈해 서방으로 망명한 하비브 수아이디아 같은 이는 군 보안기관원들이 이 학살에 일부 가담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알제리 내전 당시 민간인 학살에 알제리 군부정권, 더 나아가 프랑스 정보기관 등이 관여됐다는 것은 1996년 3월 알제리 도시 티베히린에 있는 가톨릭 수도원의 프랑스 수도사 7명의 납치와 살해 사건이 2009년에 재조명되면서 밝혀졌다. 프랑스의 퇴역장군 프랑수아 부츠왈터는 알제리 정부군이 프랑스 수도사들을 납치한 무장이슬람그룹 대원들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수도사들을 죽였으며, 프랑스 당국은 이를 은폐하는 데 공모했다고 증언했다. 무장이슬람그룹의 소행으로 만들기 위해 그 주검을 훼손하는 등 잔혹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부츠왈터의 증언을 시발로 재조사된 이 사건은 무장이슬람그룹은 수도사를 납치만 했을 뿐이고, 학살은 전적으로 정부군이 자행했다는 의혹으로 번져나갔다. 또 수도사들의 죽음이 고의건 실수건 정부군에 의해 저질러진 것은 확실한데 무장이슬람그룹이 끝까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한 것은, 당시 이 단체의 지도자인 자멜 지투니와 일부 세력들이 알제리 군부정권의 프락치라는 의심을 갖게 했다. 무장이슬람그룹 자체가 알제리 정보기관이 만든 도구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런 주장들 중 일부는 당시 이 사건을 재조사한 프랑스 법원에서 사실로 입증됐다.
그렇다고 해서 무장이슬람그룹 등 이슬람주의 세력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공작과 프락치들이 침투할 수 있는 기반은 결국 과격으로 치달은 알제리 이슬람주의 세력의 허약한 종교적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잇따른 학살 사태 등으로 이슬람주의 세력은 전체 대중으로부터 급격히 고립됐다. 결국 1999년 알제리 정부의 대사면 정책으로 알제리 이슬람주의 세력의 본류인 이슬람구국전선 대원의 대부분이 정부에 투항하면서 내전은 2002년 정부의 승리로 끝난다.

알카에다 깃발 아래 모여드는 무장세력

무장이슬람그룹 내부에서 민간인 학살 노선 등을 비판하며 1998년 ‘전도와 전투를 위한 살라피스트 그룹’(GSPC)으로 분화했던 세력들은 사면을 거부하고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이들은 2003년 알카에다 지지를 선언했고, 결국 2007년 이슬람마그레브알카에다로 조직명을 바꾸고 알카에다 북부 아프리카 지부가 된다. 이 과정은 이슬람 세계 각국의 많은 이슬람주의 무장세력들이 어떻게 알카에다의 깃발 아래 통합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였다.
알카에다는 10여 년 전인 1992년 12월29일 예멘 아덴의 한 호텔을 테러 공격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결국 이슬람 세계의 비타협적 이슬람주의 무장세력들을 자신의 깃발아래 모으게 된다. 당시 소말리아 내전 때 ‘희망회복작전’이라는 평화유지군 활동에 파견된 미군 병사들이 거쳐가던 뫼벤비크 호텔 등에 대한 이 폭탄테러 공격은 외국 관광객 2명만을 숨지게 하고, 미국 내에서도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추방돼 수단에 근거지를 둔 오사마 빈라덴과 알카에다가 미국을 상대로 한 첫 본격적인 지하드였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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