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니고 ‘빠랑’이다. 로마자 스펠링으로 하면 ‘Farang’이지만 발음은 ‘빠랑’에 가깝다. 주로 코카시안 계통 백인을 일컫는 타이어다. 한국 사람은 ‘콘까올리’로 국가명을 붙이지만, 백인들은 그냥 다 빠랑이다.
방콕 거리에서 ‘쪼리’를 끌고 다니는 빠랑을 만나는 건 ‘아이 러브 빠랑’ 스티커가 붙은 택시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쉽다. 타이에 사는 빠랑 인구는 10만 명 내외라지만 여행자 수는 100만 명 단위로 넘어간다. 변심한 타이 여자친구 때문에 콘도 난간에 매달려 자살 소동을 벌이는 빠랑 뉴스가 속보란에 뜨는가 하면, 타이 아내 명의로 등록한 재산이 아내와 함께 사라져 홈리스가 된 빠랑도 있다. 홈리스 자선단체 ‘이사라촌 파운데이션’에 따르면, 9월 현재 타이 전역 빠랑 홈리스는 약 200명이다. 증가 추세란다.
방콕에서 두세 시간 차를 타고 가면 나오는 파타야는 빠랑이 북적대는 대표적인 휴양지다. 북적대는 빠랑 옆에는 이산(동북부 지방) 출신 언니가 잠시 애인 노릇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빠랑은 사회 현상을 ‘넌지시’ 담은 언어가 된다.
10여 년 전 처음 타이를 여행할 때였다. 눈에 끊임없이 거슬렸던 게 바로 늙은 빠랑과 딸내미뻘 되는 타이 언니들의 데이트 장면이었다. ‘아시아 여자’라는 동일한 정체성 때문인지 저 ‘할배들’이 나를 쉽게 볼 것 같아 지레 불쾌했다. 그렇다고 그런 커플이 꼭 ‘그런 커플’만은 아닐진대, 영화 에서 문숙(고현정)이 그러지 않았던가. ‘독일남친사’를 캐묻는 중래(김승우)에게 ‘그냥 사람끼리 만나는 거’라고.
그로부터 몇 년 뒤, 나 역시 그런 편견의 희생자가 된 적이 있다. 치앙마이 거리를 함께 걷던 빠랑 친구가 갑자기 멈춰서 불쾌해했다. “방금 저 여자, 왜 저렇게 우리를 빤히 보며 가는 거야? 네 귀고리가 너무 커서 그런 거 아냐?” 우리를 빤히 쳐다봤을 여성(의 뒷모습을 보니 빠랑 여성이었다)이 왜 그랬을지 짐작하는 건 친구도 나도 어렵지 않았다. 워낙 빼어난 현지 외모에, 몇 해 전 내가 그런 시선으로 ‘그런 커플’들을 봤을 것이다. 남 귀고리 탓하지 말고 아이스크림이나 먹자고 했다.
빠랑은 정치적 언어이기도 하다. 요즘처럼 ‘태국기’가 방콕 하늘에 펄럭이는 시절이면 빠랑의 정치적 함의는 짙어지고 깊어진다. 극우 왕정주의자들이 ‘전사’로 분한 거리에서 빠랑은 타이 정치를 이해하지 못하며, ‘빠랑 민주주의’는 타이스럽지 않다. 심지어 일부 빠랑 기자들은 탁신에게 매수돼 ‘무식한 이산 버펄로’(레드셔츠)에게 편향적이기까지 하다! 천박하고 부패한 탁신 대신, 교육 수준이 높고 도덕적인 엘리트를 임금님이 잘 골라 총리 삼아주면 그것이 바로 타이 스타일의 민주주의. 어메이징 타일랜드, 만만세다.
이유경 방콕 통신원·방콕에서 ‘방콕하기’ 10년차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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