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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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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공작, 지하드의 불을 놓다

③ 몰려드는 이슬람 전사들로 아프간의 소련군은 궁지에 빠지고… 성전의 포연 사이로 등장한 청년 부호 빈라덴
등록 2013-11-08 15:06 수정 2020-05-03 04:27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군은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곧 주요 도시와 이 도시들을 잇는 도로 및 인근 지역을 장악했다. 그뿐이었다. 주요 도시들을 잇는 가는 띠 모양의 지역에서만 영향력을 확보했다. 아프간의 광막한 황야와 산악지대는 무자헤딘들의 무대가 됐다.
소련군 침공 1년 전부터 군사활동을 시작한 무자헤딘들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무기 지원을 받으면서 활동력을 높여갔다. 소련군이 완전히 장악한 수도 카불에서도 밤마다 민가의 지붕 위에서 ‘알라루 악바르’(신은 위대하다)라는 기도문이 울려퍼지며 소련에 대한 간접적인 저항을 표시했다. 소련군은 카불 등에서 벌어진 거리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수백 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아프간의 지식인, 공무원, 심지어 운동선수들까지 무자헤딘 쪽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1981년 말이 되자, 아프간의 29개 주 거의 전역에서 무자헤딘들이 자유롭게 활개를 쳤다.

무자헤딘에 날개 달아준 CIA

미국 CIA의 무기 지원을 빼놓고는 설명될 수 없다. 1979년 12월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이 승인하고 뒤이어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재승인한 최고기밀 대통령령에 의해, CIA의 임무는 무자헤딘들에 대한 은밀한 무기 전달이었다. 이 대통령령을 담은 기밀 문서에서 명시된 CIA의 목적은 ‘교란’이었다. CIA도 아프간 전장에서 명백한 승리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아프간에서 소련의 개입 비용을 높여, 다른 제3세계 지역으로의 소련 개입을 저지하려는 의도였다.
처음 전해진 무기는 1950년대까지 영국군 보병의 표준 무기였던 단발 수동식 303 리엔필드(Lee Enfield) 소총이었다. CIA의 조달관들은 그리스·인도 등지에서 리엔필드 소총을 다량 구입해서 파키스탄의 항구 카라치로 향하는 배에 선적했다. 무기를 지원받은 무자헤딘들의 전황은 기대 이상이었다. 당시 CIA의 대아프간 공작의 최일선 부서였던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지부장인 하워드 하트의 추산에 따르면, 무자헤딘들은 1981년 말이 지나면서 아프간 전역에서 많을 때는 동시에 2만~4만 건의 게릴라 전투를 벌였다. 소련군의 장점인 압도적 화력과 최신식 무기는 50~100명의 집단을 이뤄 전국에서 동시에 수만 건의 게릴라 전투를 벌이는 무자헤딘들 앞에서 무력했다.
워싱턴도 아프간 전쟁의 잠재력에 눈을 떠갔다. 1981년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중앙정보국장으로 취임한 윌리엄 케이시는 아프간 전쟁의 효용을 설파하는 전도사였다. 1982년 들어 워싱턴의 아프간 전쟁 지원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소련이 동맹국들에 지원했던 무기와 중국제 AK47 소총도 아프간으로 흘러들었다. 무기시장에서 폐기 직전이던 재고 구식 무기는 갑자기 가장 활발하게 거래되는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총류탄인 RPG7에 이어 60mm 중국제 박격포가 추가되고, 12.7mm 기관총 2천 세트까지 공급됐다. 전형적인 공격형 무기들이다. CIA는 주로 공산권에서 생산된 무기들을 구입해 아프간 반군들에게 지원했다.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감추려는 의도였고, 다른 공산권 국가들을 아프간 지원에 개입시켜 공산권을 분열시키려는 목적이었다.
1960년대 국경 분쟁을 거치면서 소련과 적대관계로 변한 중국은 아프간 반군 지원을 통해 자신에 대한 소련의 포위망을 돌파할 뿐만 아니라 물질적 이득도 챙기는 일석이조의 장사를 했다. 베이징 주재 CIA 지부가 직접 베이징 당국과 협상해, 매년 수천만달러의 무기 거래 계약을 체결했다. 소련이 무기를 지원했던 이집트 등 제3세계뿐만 아니라 폴란드 등 소련의 직접적 영향 아래에 있던 동구 위성국가들의 부패한 군장교들도 이 거래에 개입했다. 폴란드군 장교들은 은밀히 소련제 재고 무기들을 CIA에 팔아넘기며 수익을 챙겼다. 당시 폴란드는 레흐 바웬사의 자유노조운동이 반소운동으로 불붙으며 체제 이완이 시작되고 있었다. CIA의 폴란드군 재고 무기 구입은 자유노조 지원 공작과도 궤를 같이했다. 이집트는 1950~60년대 소련이 자신들에게 팔았던 구식 무기들을 CIA에 재판매했다. 소련이 동맹국들에 지원한 무기가 소련 자신을 위협하는 무기로 탈바꿈했다.

적은 비용으로 거둔 최대 성과

아프간 카불에서 방글라데시 치타공까지 이어지는, 인도아대륙의 동서를 횡단하는 2천 년이 넘는 ‘그랜드 트렁크 로드’는 아프간 반군에 전해질 무기를 실은 일제 도요타 픽업트럭들로 붐볐다. 카라치에서 하역된 무기들은 일단 라왈핀디의 집하장으로 옮겨진 뒤 다시 아프간 국경을 따라 늘어선 무기 창고로 실려가서 무자헤딘들에게 배분됐다.
1981년 회계연도(1980년 10월~1981년 9월)에 3천만달러였던 미국 정부의 아프간 반군 지원 예산은 1984년 2억달러로 늘었다. 아프간 반군 지원 예산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지원과도 연계됐다. 일종의 매칭 펀드였다. 미국 정부의 공식 지원 예산만큼 사우디도 아프간에 지원한다는 협정이 레이건 대통령과 사우디 왕가 사이에 맺어졌다. 사우디 쪽의 지원을 합칠 경우, 1984년이 되면 아프간 반군에 대한 공식적 지원은 4억달러가 된다. 1981년 한 해에만 아프간의 사회주의 정부에 10억달러를 지원한 소련 쪽의 지원에 비하면 미미했으나, 미국 쪽의 지원 효과는 소련에 비해서는 수백 배였다.
무자헤딘에게 소총 리엔필드가 전해진 지 4년 만인 1984년 1월, 윌리엄 케이시 중앙정보국장은 레이건 대통령에게 아프간 전쟁 비밀공작의 진전을 보고했다. 무자헤딘들은 소련군 1만7천 명을 사상시켰다. 250~300대의 소련군 전투기가 추락됐고, 2750대의 소련군 탱크와 장갑차, 8천 대의 트럭, 지프 등 수송 차량들이 파괴됐다. 무자헤딘들은 아프간의 62%를 통제했다. 소련군이 무자헤딘의 저항을 진압하려면 병력의 3~4배나 증원해야만 했다. 하트 중앙정보국 지부장은 소련군의 무력함에 빗대 “성폭행범들이 불알이 없다”고 표현했다.
이 전쟁은 이미 소련에 직접 원조로만 120억달러를 지급하게 했다. 미국이 쓴 돈은 2억달러, 이에 매칭된 사우디의 2억달러 등 모두 4억달러라고 케이시는 강조했다. 심지어 아프간 반군들이 아무다르야강의 국경을 넘어 소련 영토로 진입해 소련령 중앙아시아 자치공화국 내의 무슬림들을 선동하는 공작도 감행했다. 소련군이 1979년 12월 침공 때 넘었던 강이 아프간 반군들이 소련 영내에 진입하는 통로가 됐다. 소련 영내에서 외부 세력이 후원한 폭력적인 게릴라 활동이 벌어진 것은 1950년대 초 이후 처음이다. 아프간 침공이 오히려 소련에 영내에서 게릴라 활동을 허용하는 안보 위기를 초래하는 궁지로까지 몰았다.
아프간 전쟁 공작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CIA가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올린 가장 성공적인 공작으로 입증됐다. 이 공작의 조연은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였다. 무자헤딘에 대해 미국과 매칭 지원을 한 사우디 왕가 정부는 이슬람의 종주국으로서 형제 이슬람 국가에 대한 무신론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을 막는 성전을 지원할 도덕적 명분이 있었다. 국내에서 1970년대 말부터 들끓기 시작한 이슬람주의 세력의 압력이 증가해, 이들의 관심을 국외로 돌리려는 목적도 컸다. 투르키 파이살 왕자가 이끄는 사우디의 정보기관인 총정보국(GID)은 사실상 아프간 반군 지원을 하면서 정보기관으로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사우디로 쏟아져 들어오는 오일달러로 무장한 GID와 그 수장인 투르키 왕자는 아프간 반군과 이슬람주의 세력에 가장 관대한 후원자였다.

파키스탄, 미국의 대소 전진기지로

파키스탄과 그 정보부(ISI·Inter-Services Intelligence)는 CIA의 아프간 공작 대리인이었다.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은 파키스탄 영내를 거칠 수밖에 없었고, CIA가 직접 개입할 경우 발생할 위험성 때문에 파키스탄 정보 당국과의 연계를 강조했다. 파키스탄 역시 아프간 공작은 자신들을 거치도록 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 직전 파키스탄에서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무함마드 지아 울하크는 아프간 반군들을 지원하면서 파키스탄의 이슬람화도 적극적으로 추진해 이슬람주의 확산의 씨를 뿌린다. 파키스탄에 소련의 아프간 개입은 중대한 안보 위기였다. 파키스탄은 친소 국가인 인도와 남쪽에서 전쟁 상태로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북쪽의 아프간마저 친소 국가로 넘어갈 경우, 양쪽에서 적대적인 세력에 둘러싸이는 안보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란 혁명에 이어 아프간 사태는 미국에 파키스탄의 전략적 가치를 더욱 고양시켰다. 이란 혁명으로 미국은 이란에 있던 감청시설 등 소련을 겨냥한 정보 및 군사 시설들을 상실해서 그 대체지가 절실했다. 파키스탄은 이란을 대체하는 미국의 대소 전진기지로서 가치가 더욱 증대됐다. 지아는 아프간 사태에 개입하는 비밀공작을 서남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안보를 보장하는 가장 신중한 방안으로 생각했다. 8년 전 동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지원하는 인도와의 전쟁에 완패한 파키스탄은 아프간 위기를 자신들의 안보 증진 기회로 생각했다.

전쟁의 변곡점이 된 1984~1985년

파키스탄에서 아프간 사태는 이슬람 국가로서의 정체성 위기를 다시 조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첫 이슬람권 분쟁은 사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독립 과정에서 빚어졌다. 영국령 인도에서 소수였던 무슬림들은 다수인 힌두교도 주도의 인도 건국을 피해서 파키스탄을 분리독립했고, 이 과정에서 최대 100만 명이 숨진 폭력 사태는 파키스탄에 깊은 트라우마를 심어줬다.
파키스탄 분리독립 당시 인도 영국군 장교이던 지아는 그 과정에서 빚어진 폭력 사태를 지켜보면서 이슬람 정체성을 확보한 인물이다. 그는 역대 파키스탄 지도자 중 가장 이슬람주의에 경도됐다. 아프간의 무슬림형제들의 투쟁은 파키스탄의 지아 정부와 이를 지지하는 이슬람 세력에는 자신들의 이슬람 정체성을 시험하는 중대한 도전이었다. 이는 결국 파키스탄을 이슬람주의 무장투쟁의 배후지로 자리매김하게 하고, 나중에 파키스탄에도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다. 지아는 카터 행정부가 제안한 4억달러 원조를 일축한 뒤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자 32억달러 원조와 F16 최신 전투기 구매까지 얻어냈다. 그는 핵개발까지 나아가고,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등 지도부와의 만남에서도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이를 뻔히 알고 있던 레이건 대통령 등 워싱턴 지도부도 애써 모른 척해서, 나중에 북한과 이란의 핵개발 모델이 되게 했다.
파키스탄 정보부는 무자헤딘에 대한 무기 배분을 물론이고 훈련까지 담당했다. 두 나라의 접경지대에 세워진 캠프들은 무자헤딘들의 훈련장이자 발진기지였다. 특히 지아는 국경지대에 수백 개의 이슬람종교학교인 마드라스 설립을 추진했다. 이 학교를 거친 세력들이 현재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탈레반들이다. 마드라스는 자연스럽게 이슬람주의와 지하드 전사들을 퍼뜨리는 양성소가 됐다. 파키스탄 정보부도 선호하는 무자헤딘은 현대 이슬람주의 원조인 무슬림형제단 출신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같은 이슬람주의 세력이었다. 파키스탄 정보부는 1983년 이후 아프간 왕정 세력과 부족 세력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아프간 전쟁은 점점 이슬람권의 성전인 지하드의 성격이 짙어지면서 1984~85년을 지나며 변곡점으로 치닫는다.
수세에 몰리던 소련이 강구하는 특단의 대책, 이에 맞서는 CIA의 신무기 지원, 그리고 이슬람권에 모여드는 지하드 전사들의 파장이 뒤섞인다. 그 파장의 변곡점에서 사우디 왕가와 연결된 부호 집안의 젊은이 오사마 빈라덴이란 인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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