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국제정치의 핵심적인 원리 가운데 하나는 주권 존중이다. 그 기본은 다른 나라에 대한 무력 사용의 금지다. 유엔 헌장은 주권평등 원칙을 천명하고, 다른 나라에 대한 무력 행사를 금지하고 있다. 예외는 다른 나라의 침공을 받아 자위권 차원에서 무력을 행사하는 경우와, 국제평화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무력을 행사하는 경우다. 이 모든 게 평화를 위해서다. 각 나라가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무력을 행사한다면 국제사회는 무법천지가 되고 말 것이다.
정의.
국제정치의 또 다른 핵심 원리는 국제 인권장전이 천명하고 있는 인권 존중이다. 유엔은 세계인권선언과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등 대부분의 회원국이 가입한 조약을 통해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권리를 규정하고 그 보호를 각 나라의 의무로 못박고 있다. 어떤 나라가 자국민이든 타국민이든 그 인권을 앗아가는 행위를 한다면 이는 국제사회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단죄받아야 한다.
모순.
앞의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 어떤 주권국가에서 정부가 그 국민의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하거나 국민의 인권 유린을 방관하는 경우다. 이 나라는 국제적 평판에 개의치 않는 무지막지한 정부를 둔 나라여서,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주권 존중의 원칙을 따른다면, 국제사회는 힘으로 이 나라 정부의 버릇을 고쳐놓을 수 없다. 정의의 원칙이 실현되지 않는다. 반대로 인권 존중의 원칙을 우선한다면, 국제사회가 무력을 써서라도 이 나라의 인권유린 사태를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이때는 한 나라의 주권을 무시해야 한다. 평화의 원칙이 침해된다.
인도적 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
저 모순을 해결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고안된 개념이 인도적 개입이다. 어떤 나라에서 대량 학살이나 인종 청소 등 인간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범죄행위가 일어날 때는 다른 국가가 인도적 차원에서 군사적으로 개입할 권리를 가지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1990년대 코소보에서 벌어진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인종 청소, 르완다에서 자행된 투치족 대학살 등을 겪으면서 인류의 양심이 자극된 결과였다. 물론 인도적 개입이 또 다른 목적의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일었다. 하지만 결국 유엔 정상회의는 2005년 ‘어떤 국가가 대량 학살이나 인종 청소 등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게 분명할 경우 시의적절하게 결정적이고 집단적인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인도적 개입은 여전히 국제사회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의 하나일 뿐, 확고한 원칙이나 의무로 자리잡지는 못하고 있다.
리비아.
카다피 정부의 폭격과 미사일 공격으로 민주화 시위대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리비아의 민중에게는 국제사회의 인도적 개입이 절실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포함한 국제사회는 저 아비규환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다. 그곳에 있는 자국민의 생명을 구해내는 게 급선무일 뿐이다. 리비아의 석유에 대한 이해관계가 이런 미온적 대처의 주된 배경으로 지적된다. 수많은 나라가 카다피의 독재권력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도 그 석유와 석유에서 나온 돈 때문이다. 인류의 양심을 동원해 평화와 정의라는 고상한 가치를 저울질해서 인도적 개입이라는 절충점을 찾아낸 최근 10여 년의 역사는 그저 신간 역사책에 묻어버리고, 인류는 다시 평화와 정의와 석유의 저울질에 나설 것인가.
외신을 통해 리비아 민중의 비명과 유혈을 전해듣는 이 순간, 평화를 지킴으로써 잃는 것이 평화를 깸으로써 잃는 것보다 많은 경우도 존재한다는 평화의 모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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