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상 사회주의자인 외교관·정치인들이 미국 보수파 뺨치게 이스라엘을 옹호해온 이유는…

지금 중동에서는 전운이 심상치 않게 감돌고 있다. 노르웨이 노동당의 알선으로 이스라엘 노동당과 아라파트의 일파가 맺은 1993년의 오슬로협정은, 사실상 깨지고 말았다. 평화도 가져오지 못한데다 아랍인에 대한 종래의 잔혹성 일변도의 인종주의적 태도를 하나도 고치지 못해 이스라엘의 국제적 위신을 실추시킬 대로 실추시킨 이스라엘 노동당은, 정체성과 뚜렷한 자기 색깔을 완전히 잃어 심각한 분열과 위기를 보인다.
덴마크·핀란드·스웨덴과도 다른 입장
팔레스타인쪽에서는, 노르웨이 노동당이 그토록 믿고 밀었던 아라파트와 그 일파가 원칙이 결여된 타협주의와 극심한 부정부패로 인심을 크게 잃어, 대표성 상실의 위기에 직면한다. 잃었던 나라와 인간적인 존엄성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아픔과 죽음을 불사하는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오슬로협정과 같은 침략자와의 타협을 더이상 허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슬로협정에서 이상하게도 전혀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이스라엘 점령하의 동부 예루살렘 문제, 300만명의 팔레스타인 피난민의 재산권과 보상문제,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비극에 대한 이스라엘쪽의 역사적 책임의 인정과 사과, 과거 청산의 문제 등의 팔레스타인의 가장 긴요한 현안들이 공평하게 처리되지 않는 한, 더이상의 ‘협상’과 ‘협정’들은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아무 의미도, 그리고 아무 구속력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슬로협정과 관련된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가 있다. 양쪽 협상을 중재한 노르웨이 정치인과 외교관들은, 결국 협상과 협정을 무의미하게 만들 이스라엘 노동당의 아랍인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멸시와 이스라엘 위주의 협정 내용 등을 과연 협상 때 왜 감지하지 못했을까? 파쇼 사론(Sharon)과 노동당 일부 거물들의 현재와 같은 정치적인 연합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스라엘 노동당 정치인과 군사적 파시즘의 깊은 관계에 그 당시의 노르웨이는 왜 이토록 무관심했을까? 그리고 300만명의 팔레스타인 피난민들의 재산권과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협정에 없다는 것을 보고도 왜 눈감았을까? 이와 같은 중대한 결함이 결국 협정 자체와 중재국으로서의 노르웨이의 위신을 의문에 빠뜨릴 줄을 과연 생각하지 못했을까? 한마디로 거의 반세기 동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아픔과 희생들을 어떻게 이토록 가볍게 처리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태도의 배경에 있는 노르웨이 외교관·정치인들의 팔레스타인관(觀)이 과연 무엇이고, 이스라엘관(觀)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중동분쟁 전체에 대한 노르웨이의 근본적인 태도는, 어떤 요소에 의해서 어떻게 형성·변모됐을까?
사실 노르웨이의 공식적 외교 원칙과 정치·경제·사회적 상황만 놓고보면 노르웨이가, 여러 서구국가 중에서도 팔레스타인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야 할 근거를 충분히 갖는다. 첫째, 노르웨이의 외무부가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노르웨이 외교의 주요원칙은 ‘인간 존엄성과 인권의 전세계적 신장·보호’다. 매일같이 이스라엘 군인과 유대인 정착촌 무장 주민으로부터 욕설, 구타, 사살을 당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존엄성과 인권이야말로 노르웨이 외무부의 보호- 아니, 적어도 관심- 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둘째,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노르웨이는 아랍권에 대한 식민주의적 침략과 약탈의 경력도, 중동에서의 이렇다 할 만한 이해관계도 전혀 가지지 않는다. 셋째,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와 달리, 노르웨이의 유대계 시민의 수가 1천명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도 상당수가 이스라엘의 군국주의와 국수주의를 준열히 비판한다. 미국과 같은 유대계 시민의 친이스라엘 로비를, 노르웨이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다. 그리고 넷째, 60년 동안이나 노르웨이 정치를 이끌어왔던 노동당은, 적어도 원칙상 늘 제3세계의 해방운동들에 대해서 호의적 관심을 보였다. 노르웨이와 흡사한 사회민주주의 주도의 정치체제를 가진 이웃 나라 스웨덴의 경우만 보더라도, 70년대에 ‘팔레스타인의 대변인’의 속칭을 가질 정도로, 이스라엘 침략의 비판에 늘 앞장섰다. 그동안 덴마크·핀란드도 매우 흡사한 친팔레스타인적 경향을 보여왔다. 그러나 노르웨이는 이 문제에서 기타 스칸디나비아 국가와 처음부터 상당히 다른 입장을 가져왔다.
‘종교적 분쟁관’이 근본적 원인
팔레스타인 주민의 추방과 아랍인의 무분별한 학살 속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탄생된 직후부터, 노르웨이는 이스라엘의 ‘튼튼하고 믿음직스러운 후견인’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유엔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행위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표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 재정적·기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비밀리에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에 뻔히 쓰일 수 있는 중수(重水)를 70년대 말까지 계속 지원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스라엘로부터 “무기 개발에 안 쓰겠다”는 언약을 받기는 했지만, 그 언약의 진가를 노르웨이 외교관들이 몰랐을 리 있겠는가? 1967년의 ‘6일전쟁’ 때, 노르웨이 주류 일간지에서 “이스라엘을 도울 의용군을 보내자!”는 노르웨이 주요 정치인들의 호소문도 나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제3세계 문제에서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노르웨이 노동당(AP)과 전국노련(LO) 지도자들은, 오히려 이스라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애착을 나타냈다. 그들과 이스라엘을 ‘야만적인 중동에서 유일한 정상적 국가’로 보는 보수적 정치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일종의 ‘충성 경쟁’을 벌였다. 반면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1970년대 말까지 철저하게 냉대 일변도의 태도를 보여, 서구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팔레스타인 피난민에 대한 인본주의적 구호 물자 지원도 거의 안 했던 것이다.
신념상 사회주의자였던 노르웨이 노동당 정치인·외교관들이 미국 보수파를 능가할 정도로 이스라엘을 옹호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물론, 1941∼45년간의 독일군의 노르웨이 점령 시절에 독일·노르웨이 파시스트에 의해서 학살당한 700여명의 노르웨이 유대인에 대한 죄책감도 하나의 이유가 됐다. 유대인에 대한 폭력은 최근까지도 ‘가시적인 문제’였지만, 이스라엘에 의한 아랍인들의 학살은 이국적이고 머나먼 ‘보이지 않는 문제’였다. 그리고 유창한 영어·독일어로 ‘사회주의적 이스라엘의 건설’의 성과를 설명하는 유럽 출신의 이스라엘 노동당 정치인들은, 신념·문화상으로 ‘보르캔 잉글리시’(broken English)의 엉터리 몇 마디로, ‘우리 조국, 우리 땅, 우리 피붙이’만 외쳐대는 팔레스타인의 ‘속좁은 민족주의자’보다 고급스러운 노르웨이 좌파정치인에게는 훨씬 더 친근했을 수도 있다. 고난과 식민화를 경험해보지 않은 노르웨이 사회주의 정치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지도자들을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로 만든 절박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는가?
그러나 노르웨이와 기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중동 분쟁관(觀)을 다르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다른 스칸디나비아 국가와 비교 안 될 만큼 노르웨이의 노동운동은 지극히 종교적이었다. 대부분 독실한 루터파 신자인 노르웨이 노동당·노련 간부와 진보계 외교관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족을 ‘팔레스타인의 성지(聖地)’의 ‘당연한 주인’으로 인식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구·신약에 ‘현대적 의미’를 부여하는 그들은, 구약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의 토착민의 사투(死鬪)’와 이스라엘·아랍의 갈등을 동일시하였다. 이와 같은 종교적 분쟁관(觀)으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선민(選民)의 영원한 적대자인 사교(邪敎)집단’밖에 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입장의 형성에, 유럽인들의 뿌리깊은 오리엔탈리즘(이슬람교와 아랍·중동 문명에 대한 멸시·적대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결국, 노르웨이 노동당의 시각으로 보는 중동분쟁은, 후진적이며 배타적인 ‘중세적’ 사교집단에 대한 사회주의적 지향의 선진적 선민(選民)의 ‘의로운 투쟁’이었다. 노르웨이의 보수파의 정치인의 경우는, 아예 공·사석의 구별없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이스라엘을 보호한다”는 식의 발언을 무수히 해왔다.
중동외교의 실패를 교훈삼아…
물론 1982년의 이스라엘의 야만적인 대(對)레바논 침략과 피난민의 학살 등은 위와 같은 분쟁관(觀)을 크게 흔들기 시작했다. 노르웨이 외교계의 요인들이 아라파트 일파를 처음으로 상대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그리고 그때부터 노르웨이는 피난민들에게 상당 액수의 지원을 해주는 ‘팔레스타인의 재정적 후원자’가 돼 팔레스타인의 지도부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친이스라엘적 근본적 입장에는 별 변화가 안 보였다. 노르웨이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의 새로운 관계를 “이스라엘 평화와 안정의 보장을 위하여” 활용하려고 했다. 양쪽간 최초의 중재(1988∼89년)는 이스라엘 노동당의 부탁에 의한 것이었고, 그 의도는 역시 아라파트 일파의 입장을 좀더 ‘온건한’(즉, 타협주의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오슬로협상 동안 중재국 노르웨이는 내내 팔레스타인 입장의 온건화, 현실화, 중도화에 주력했다. 그 결과는 역시, 이스라엘 극우파의 가혹행위도 정지시키지 못하고 팔레스타인 민중의 욕구도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 그리고 어차피 수명이 너무 짧았던- 오슬로협정이었다. 이스라엘의 기만정치, 노르웨이의 친이스라엘적 편향성, 그리고 아라파트 일파의 부패·타협주의의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오슬로협정이 깨지고 팔레스타인 민중이 다시 생사를 건 투쟁의 길에 오른 현재에, 노르웨이 여론과 외교정책에 과연 근본적인 변화가 생길까?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하나님과 무관한 미국 국방부와 거대자본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할 것인가? 그리고 침략자와 피침략자의 사이에 ‘중도 타협’이 부적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인가? 문화·종교적 이질성과 때묻은 편견들을 넘어서 팔레스타인의 고통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최근의 노르웨이 매체의 중동 관련의 보도의 방향으로 봐서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분명히 넓어져 가고 있다. 지금까지의 노르웨이 중동외교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많은 노르웨이 사람들과 대중 매체들은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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