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프로풋볼(NFL) 캔자스시티 치프스의 타이트엔드(리시버·블로커 역할을 모두 하는 포지션) 트래비스 켈시는 2023년 3월 생애 첫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의 호스트를 맡았다. 그는 이 코미디쇼 생방송 들머리에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를 모르실 수도 있는데요, 말하자면 슈퍼볼에서 두 번 우승한 사람입니다.”
키 196㎝에 몸무게 118㎏의 거한은 이렇게 자랑하며 짜릿한 표정을 지었다. 자격 있는 웃음이었다. 켈시는 NFL 최강팀으로 꼽히는 캔자스시티의 주전 타이트엔드로 2020년과 2023년 두 차례 슈퍼볼 제패에 공헌했다. 두 번의 슈퍼볼에서 모두 최우수선수(MVP)상을 받은 불세출의 쿼터백 패트릭 머홈스가 가장 신뢰하는 공격 파트너였고, 두 번의 슈퍼볼에서 모두 결정적 터치다운을 기록한 왕조의 공신이었다.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나날이었으나 켈시 생애 가장 중요한 패스는 그 뒤에 왔다. 쿼터백은 테일러 스위프트였다.
‘트래비스 켈시와 테일러 스위프트가 사귄다더라’는 소문만 무성하던 2023년 9월24일, 캔자스시티와 시카고 베어스의 경기가 열린 애로헤드스타디움에 스위프트가 나타났다. 켈시의 등번호(87)가 적힌 유니폼을 입고 켈시의 어머니와 함께 경기장을 찾았다. 스위프트는 그다음 경기(10월1일 뉴욕 제츠전)도 왔고, 그다음 경기(10월12일 덴버 브롱코스전)도 왔다. 중계진은 경기 하이라이트만큼이나 스위트룸에서 환호하고 손뼉 치는 스위프트를 자주 클로즈업했다. 이따금 슬로모션을 걸기도 했다. 화면 밑에는 이런 자막을 넣었다.
“통산 12회 그래미상 수상자.”
‘스위프트가 켈시랑 정말 사귀나보다’라는 대중적 깨달음이 미국을 강타했고, 국면은 크게 요동쳤다. 전세계에서 가장 크고 충직한 팬덤인 ‘스위프티’(스위프트의 팬덤)가 프로풋볼 구매자로 유입됐고, 출렁이는 밀물 앞에서 NFL 사무국은 부지런히 노를 저었다. 엑스(옛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공식 계정에 스위프트의 사진과 그의 노랫말을 패러디한 문구를 올려 새 손님들을 환대했다. 스위프트가 출몰한 경기는 2023년 슈퍼볼 이후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NFL의 소셜미디어 팔로어도 급증했다. 단순한 두 셀럽의 만남이 아니라, 두 세계의 만남이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오늘날 팝음악계에서 가장 우량한 브랜드다. 16살에 전도유망한 컨트리 가수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2023년에 데뷔 17년차를 맞았다. 그간 세운 차트 기록만 열거해도 이 원고 분량을 넉넉하게 채울 수 있다. 가령 빌보드는 2019년 차트 누적 기록을 합산해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순위를 매겼는데, 스위프트는 8위를 차지했다. 비틀스(1위), 롤링스톤스(2위), 엘턴 존(3위), 마돈나(5위), 마이클 잭슨(7위) 등 찬란한 이름으로 10위권이 붐비는 가운데 2000년대 데뷔한 아티스트는 스위프트가 유일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스위프트는 사업모델을 선도하는 혁신가이자, 자신의 영향력을 선용해 신념을 관철하고 시장의 규칙을 바꿔내는 운동가이다. 그는 2015년 스트리밍 기업의 저작권료 분배 정책에 항의해 애플뮤직에 “음원을 공급하지 않겠다”고 맞섰고, 애플뮤직은 하루 만에 항복했다. 최근에는 전 소속 레이블이 매각되면서 당시 창작물의 마스터권(녹음물에 대한 권리)이 원치 않는 회사에 넘어가자, 과거 음반을 모조리 재녹음하기 시작했다. 같은 노래에 대한 새 녹음물로 자신의 권리를 지킨다는 구상이다. ‘테일러스 버전’이라는 라벨이 붙은 이 재녹음 시리즈는 나오는 족족 원본을 뛰어넘는 흥행을 기록하며 새 수익모델이 됐다.
훌륭한 작곡 능력에 행동주의자 면모까지 갖춘 스위프트의 입체적 매력은 다국적 지지 세력을 규합했고, 그 위력은 NFL 사무국이 소셜 계정 프로필 대문에 스스로 ‘테일러스 버전’ 라벨을 붙이도록 했다. 프로풋볼은 미국 4대 프로스포츠(NFL, NBA, MLB, NHL)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리는 리그로, 2021년 기준 180억달러(약 23조원)를 벌었다. 이는 같은 시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가 낸 수익(60억달러)의 세 배에 이른다. 로저 구델 NFL 총재는 “우리가 스포츠 엔터테인먼트의 정점”이라고 말해왔다.
스위프트 역시 2023년 ‘에라스 투어’ 공연으로 미국에서만 약 57억달러의 경제 부양 효과를 냈다. 이 낙수효과는 남미를 찍고 2024년 아시아와 유럽으로 향할 예정이다. 단일 투어로 역대 최다 수익을 낸 아티스트는 떼놓은 당상인데, 그가 자기 몫으로 가져갈 수익은 41억달러로 추정된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이 추산액을 전하면서 이보다 국내총생산(GDP)이 적은 나라가 42개나 된다고 썼다. ‘스위프트노믹스’(테일러 스위프트가 일으킨 경제효과)의 훈풍 앞에 캐나다, 칠레, 헝가리의 정치인들이 에라스 투어 유치를 위한 편지를 띄웠다.
NFL도 여러 이유에서 허리를 깊이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신규 팬 유입은 언제나 고민거리였고 수년 동안 이어진 사무국 직원과 구단주, 선수들의 가정폭력, 성희롱, 인종차별 사건으로 이미지를 쇄신할 필요성도 컸다. 다만 NFL과 스위프트의 동행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 스위프트를 떠받드는 사무국의 태도가 탐탁지 않은 올드 팬들은 조롱으로 텃세를 부리고, 스위프티도 스위프트와 켈시의 연애가 끝나는 대로 떠나갈 공산이 크다. 이미 미디어의 과도한 호들갑에 ‘테일러 피로’를 호소하는 이도 많다.
관건은 역시 두 사람의 연애 전선이다. 켈시의 어깨가 무거운데, 모쪼록 스위프트의 슈퍼볼 하프타임 쇼가 성사될 때까지는 애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강수 <한겨레> 기자 turner@hani.co.kr
*스포츠 인(人)사이드는 동서고금 스포츠 선수 관찰기로 4주마다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