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체스대회 싱큐필드컵 3라운드 대국에서 노르웨이의 망누스 칼센(33)이 미국의 한스 니만(20)에게 졌다.
체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랄 만한 결과였다. 칼센은 누구인가. 2004년, 13살 나이에 소련의 마지막 세계 챔피언으로 왕좌에서 내려온 지 4년 된 가리 카스파로프와 겨뤄 비기면서 전설의 시작을 알렸고, 체스 기사의 기력을 측정하는 점수 체계인 엘로(Elo)레이팅 신기록 보유자(2882점·2014년)이자, 10년간(2013~2023) 세계 챔피언을 지내고 14년째(2010~) 세계 랭킹 1위를 유지 중인, 당대 최강을 넘어 역대 최강에 손꼽히는 기사다. 이 패배는 54경기 만의 패배였다. 게다가 이 경기에서 칼센은 백을 잡았다. 체스에서는 백이 선수를 둔다. 바둑처럼 후수에 가산해주는 덤도 없기에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이에 비해 니만은 대회 직전 대타로 들어온 신예였고, 출전한 10명 중 가장 엘로레이팅이 낮았다. 이변이었다. 그러나 진짜 이변은 그 뒤에 벌어졌다.
칼센은 패배 직후 대회에서 기권해버렸고, 자신의 트위터(현 엑스)에 의미심장한 영상 링크를 게시하는 것으로 입장 표명을 대신했다. 축구감독 조제 모리뉴가 경기 뒤 인터뷰에서 “내가 입을 열면 큰일 날 것”이라고 말하는 영상이었다. 체스계는 해독에 착수했고, 암묵적인 결론이 모이는 사이 칼센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약 2주 만에 온라인 대회에서 니만과 재회한 그는 첫수를 둔 뒤 곧장 기권해버렸다. 이번에도 말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확신했고, 얼마 뒤 칼센은 성명을 내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니만이 대국에서 속임수(치팅)를 썼다는 것이다.
니만은 과거 온라인 체스에서 부정행위가 발각돼 두 차례 계정이 정지된 전력이 있었다. 다만 본인은 그것이 한때 어린 날의 실수였다며 대면 게임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칼센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성명에서 “니만은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보다 더 많이, 특히 최근에는 더 자주 속임수를 쓴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대국 양상은 이례적이었고, 경기 내내 니만은 긴장하지도, 온전하게 집중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결정적 승부처에서도 그랬다”고 덧붙였다. 물증은 없었다. 그저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심증뿐이었다.
칼센의 고발은 격론을 불렀다. 한편에서는 세계 최강이라는 선수가 패배의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위력을 동원한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해 전도유망한 후배를 찍어누르려는 것 아니냐는 비난이, 다른 한편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체스가 부정행위에 취약한 시기이므로 칼센급의 고수가 자기 커리어를 걸고 제기한 의혹에 체스계는 철저한 진상규명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동조가 뒤따랐다. 칼센은 “우리는 부정행위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나는 과거에 반복적으로 속임수를 저지른 사람과 대국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거에도 체스는 종종 부정행위 논란에 휩싸였고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도 속임수 의혹이 제기되곤 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은 오늘날 체스에서 속임수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야구와 비교해 설명한다. 이를테면 야구에서는 투수의 사인을 훔치더라도 여전히 삼진당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투구 유형을 알더라도 구속에 대응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체스에서는 이기는 수를 알아차리는 일과 실행하는 일 사이에 변수가 거의 없다. 체스 규칙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컴퓨터가 계산해준 순서에 따라 손만 움직이면, 칼센과 백번 붙어 백번 이길 수 있다.
니만은 혐의를 부인했고, “세계 챔피언이나 돼서 나한테 지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칼센)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2022년 10월 발표된 체스닷컴 조사에서 니만이 온라인 대국에서 100번 이상 속임수를 쓴 정황이 드러났다. 니만의 엘로레이팅 상승 곡선 형태가 정상급 기사들의 성장에 비춰볼 때 이례적이라는 점도 지적됐다. 다만 대면 대국에서 부정행위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니만은 2023년 칼센과 체스닷컴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며 결백을 항변했지만 소송은 기각됐고, 둘의 장외 대결은 진상규명 없이 찜찜한 합의로 마무리됐다.
끝내 영구 미제 사건이 된 칼센과 니만의 공방은 두 측면에서 1500년 체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대결로 기록될지 모른다. 첫째, 이 사건은 2020년대 들어 갑작스럽게 찾아온 전세계적 ‘체스 붐’의 촉진제 노릇을 했다. 체스는 지난 3년 사이 가장 크게 성장한 게임 중 하나로, 코로나19 대유행, 넷플릭스 시리즈 <퀸스 갬빗>(2020) 흥행, 온라인방송 플랫폼 트위치와의 결합 등을 성장 원인으로 꼽는데 니만의 속임수 논란 역시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 2022년 하반기 이 사건이 불거지고 체스닷컴은 2023년 초 일평균 활성회원 1천만 명이라는 대기록을 썼다.
둘째, 공정하고 정직한 인간 지성의 승부라는 체스의 정체성에 영원한 얼룩을 남겼다는 점이다. 이제 체스를 두는 이들은 누구나 상대방이 인간인지 컴퓨터인지를 의심해야 하는 순간과 마주할 수 있다. 이미 온라인 체스에서는 프로선수를 포함해 수만 건의 부정행위가 속출하는데, 그나마 모니터링 체계를 갖춘 온라인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전문가들은 어쩌면 오프라인 대국의 보안이 더 취약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알몸 수색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대면 대국에서 부정행위를 적발하는 일은 쉽지 않다. 최선의 예방책은 보안 검색을 강화하는 정도다.
2023년 12월 국제체스연맹(FIDE)은 니만 사건의 최종 조사 보고서를 냈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칼센의 의혹 제기는 합리적 근거에 기반을 뒀으나, 니만은 대면 대국에서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
박강수 <한겨레> 기자 turner@hani.co.kr
*스포츠 인(人)사이드는 동서고금 스포츠 선수 관찰기로 4주마다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