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노 히데아키의 26부작 TV시리즈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1990년대 중후반 전세계 청춘 ‘일부’의 감수성에 치명적 영향을 미쳤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그들의 마음을 출렁이게 했다. 신원 미상 외계 세력의 침공에 맞서 인류의 영웅으로 싸우길 강요받아온 소년(이카리 신지)이 임무를 일단락한 뒤,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며 두 번째 전투를 치르는 대목이다. 이 싸움에서 그는 지치고 상처 입은 자아와 화해하며 알을 깨고 나온다. 쏟아지는 갈채 속에 소년을 둘러싼 사람들이 미소 지으며 말한다.
“오메데토(おめでとう·축하해)!”
2023년 10월27일 중국 항저우의 빈장체육관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유수영도 가지와라 다이키를 향해 똑같이 외쳤다. ‘2022 항저우장애인아시안게임’ 배드민턴 WH2등급 남자단식 결승전에서 가지와라에게 완패(0-2)하고 믹스트존 인터뷰 도중 건넨 축하다. 아니, ‘건넸다’보다는 ‘던졌다’는 표현이 맞겠다. 각자 자국 언론과 대화하던 중 유수영은 절규하듯 라이벌을 향해 ‘오메데토’를 내질렀고, 그 순간 이 장면이 겹쳤다. 2002년생인 그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알았을까. 물어보진 못했으나, 알지 않았을까 싶다. 유수영이라면.
유수영은 한국의 장애인 배드민턴 국가대표 선수다. 대부분의 장애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배드민턴도 장애 유형과 정도에 따라 세부 종목 등급이 나뉜다. WH1과 WH2는 휠체어 종목이고, SL3~4(하지 장애), SU5(상지 장애), SH6(저신장)은 입식이다. 유수영은 휠체어를 탄다. 휠체어 선수들은 코트를 가장 좁게 쓴다. 네트 바로 앞 구역으로 셔틀콕을 보낼 수 없고, 나머지 코트도 절반만 사용한다. 휠체어 특성상 횡적 이동이 어렵기 때문이다. 전후 기동력과 질긴 랠리를 버텨내는 팔심이 관건이다.
선천적으로 오른쪽 다리를 쓸 수 없어 어려서부터 휠체어를 탔던 유수영은 중학교 1학년 때 배드민턴부 담당 선생의 눈에 띄어 선수를 권유받았고, 대한장애인체육회의 기초 종목 육성 선수로 선정돼 일찌감치 엘리트 스포츠 길에 들어섰다. ‘선수를 하면 가끔 학교에 빠질 수 있다’는 말에 혹해 본격적으로 라켓을 잡았다는 그가 한국 장애인 배드민턴의 새 에이스로 올라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첫 아시안게임인 이번 항저우 대회에서는 출전한 전 종목에서 메달(은 1·동 2)을 땄다.
실력도 창창하지만, 그를 반짝이게 하는 것은 캐릭터다. 자기 별명을 ‘배드민턴계의 돌아이’라고 소개하는 유수영은 늘 톡톡 튀는 어록으로 믹스트존을 찾은 기자들을 즐겁게 했다. 10월21일 단식 예선 2연승 뒤 ‘어제 첫 경기는 어땠냐’고 묻자, “(상대에게) 1세트에 1점, 2세트에 1점을 줬다. 0점은 사람이 매정해 보여서 1점씩 줬다”고 답했다. 이어 ‘안방 응원을 등에 업은 중국 선수를 상대하는 부담감’에 대해 물으니 “이런 응원을 받으면서도 지고 있는 기분은 어떨지 궁금했다. 마음이 아프다”고 받았다.
자유분방한 자기표현은 언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단식 결승전 날에는 입장과 동시에 왼손 중지와 검지를 꼬아 얼굴 앞에 들어 올리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경기 뒤 퍼포먼스의 의미를 물으니 “만화 <주술회전>에 나오는 ‘영역전개’라는 필살기 동작”이라고 한다. 평소 제이팝(J-Pop)을 즐겨 듣는 그가 이날 경기 전 심기일전하며 들은 선율 역시 바로 그 <주술회전> 애니메이션 주제가다. 일본 싱어송라이터 이브(Eve)의 <회회기담>(廻廻奇譚)이란 곡으로, 유튜브 조회수 3억 회를 넘는 히트송이다.
기세등등과 허장성세 사이 어딘가에서 줄을 타는 패기는 여러 스타를 연상케 한다. 소싯적 바둑판 위에서의 기풍만큼이나 거침없었던 이세돌의 언변이나, 본게임 못지않게 마이크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미국프로농구(NBA) 선수들의 화술에 견줄 법하다. 서브컬처에 대한 애정을 자기 콘셉트로 써먹는 연출에서는 전 유에프시(UFC) 미들급 챔피언 이스라엘 아데산야가 떠오른다. 아데산야는 일본 만화 <나루토>에 심취한 ‘오타쿠 격투가’로 유명하다.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사랑하는 개성들이다.
이런 부류의 스타에게 필요한 미덕은 두 가지다. 도발적인 캐릭터를 뒷받침할 실력과 성적, 그리고 간혹 패하고 무너지더라도 결코 꺾이지 않는 자아.
유수영은 이번 항저우 대회 단식 결승에서 가지와라에게 통산 12번째 패배를 당했다. 가지와라는 지난 십수 년간 WH2등급 세계랭킹 1위를 지켜온 한국 배드민턴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왕좌를 꿰찬 ‘현역 최강’으로 유수영보다 한 살 많다. 여태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패배 뒤 다소 굳은 얼굴로 나타난 유수영은 “가지와라가 이번 금메달을 가져가면서 그랜드슬램(아시안게임·세계선수권대회·패럴림픽 우승)을 달성했다. 제가 노렸던 것을 빼앗긴 것 같아 씁쓸하지만, 축하한다”고 말했다.
‘센 척’은 했지만 첫 아시안게임이라 긴장도 많이 했고, 가지와라와 붙으니 팔근육에 과부하가 걸려 경기력을 유지하지 못했다고 순순하게 털어놓는 덤덤한 동공 너머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는다. 유수영이 스스로 꼽는 본인의 강점은 자신감도, 퍼포먼스도 아닌 승부욕이다. 그는 “졌을 때는 너무 분해서 눈물이 차오를 것 같다. 이 점은 운동선수로서 정말 큰 강점이라 생각한다”고 한 바 있다. 이 마음이 그의 무기라면, 가지와라의 존재는 유수영에게 축복이다. 안세영에게 천위페이가 그러했듯.
유수영은 “2024년 2월에는 세계선수권이 있고, 파리패럴림픽도 있다. 3년 뒤에는 나고야에서 다시 아시안게임이 열린다. 다음에는 내가 무조건 (가지와라를) 막겠다”고 했다. 우렁차게 현 챔피언에게 ‘오메데토’ 기습 축하를 던진 직후의 다짐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주술회전> <귀멸의 칼날> 같은 일본 만화는 이른바 ‘왕도물’이라는 장르적 규범을 따른다. 즉, 부딪히고 성장하면서 최고를 향해 정진하는 이야기다. 결은 좀 다르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 주제가 <잔혹한 천사의 테제>에도 이런 노랫말이 있다.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
박강수 <한겨레> 기자 turner@hani.co.kr
*스포츠 인(人)사이드는 동서고금 스포츠 선수 관찰기로 4주마다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