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애플렉 감독이 연출한 영화 <에어>(2023)는 스니커즈 브랜드 ‘에어 조던’의 탄생 비화를 다룬 작품이다. 1984년, 이제 막 미국프로농구(NBA)에 드래프트 3순위로 입성한 루키(신인 선수), 마이클 조던은 아직 프로 무대에서 증명한 게 없었고, 나이키는 아디다스와 컨버스에 뒤진 업계 3순위 언더도그(약자)였다. 이 이야기를 거칠게 줄이면 “언더도그 나이키가 루키 조던에게 ‘영끌 베팅’을 감행해 성공한 스토리”다. 사행성이 다분한 요약이지만, 후반부 조던의 어머니 돌로리스 조던의 대사가 주는 울림은 깊다(스포일러 주의).
돌로리스는 나이키와 계약을 성사하기 직전 갑작스러운 제안을 내놓는다. 전세계에서 판매되는 에어 조던 신발 수익금 일부를 로열티 명목으로 아들이 가져가겠다는 것. 전례 없는 요구답게 그 근거 역시 전대미문이었다. 나는 내 아들을 알고, 조던도 자신의 가치를 안다. 조던은 매일 밤 40점씩 득점하고 신인상, 올스타, 올해의 수비수, 득점왕, 최우수선수와 챔프전 우승을 휩쓸 것이다. 조던이 NBA 덕을 보는 게 아니라 NBA가 조던 덕을 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
팔불출을 넘어, 광신도의 겁박처럼 들리는 주장을 돌로리스는 조곤조곤 늘어놓고, 이미 결과를 아는 우리는 기묘한 전율 속에 설득되고 만다. 돌로리스의 말이 끝나면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당시, 조던의 가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이는 조던 자신과 그의 어머니밖에 없었다고.
2023년 7월 사우디아라비아의 프로축구구단 알힐랄이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에 킬리안 음바페(24) 영입 명목으로 10억유로(약 1조4천억원)를 제의했고, 얼마 뒤 ‘내부 소식통’을 통해 음바페가 사우디의 제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거절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어쩔 수 없이 이 영화를 떠올려야 했다. 음바페가 이 사안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일절 알려진 바가 없으나 감히 추측하건대, 그는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 이 거래는 본인의 가치와 수지가 맞지 않으니까.
음바페는 선택받은 소년이다. 1999년 파리 교외의 소도시 봉디에서, 카메룬계 아버지 윌프리드 음바페와 알제리계 어머니 파이자 라마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6살에 AS 모나코 최연소 1군 데뷔 기록을 갈아치우며 프랑스 리그앙(1부 리그) 첫 경기를 뛰었고, 다음 시즌 17년 동안 리그 우승과 연이 없던 팀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18살에는 프랑스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2018 러시아월드컵에 출격해 조국에 20년 만의 트로피를 선사했다. 월드컵 신인상은 위대한 선수의 탄생을 축복하는 조촐한 보상이었다.
월드컵 전에 세기의 재능을 한발 앞서 품은 건 파리, 그리고 카타르다. 2011년 카타르투자청에 인수되면서 막대한 오일머니 뒷배를 얻은 파리는 2017년 여름, 음바페를 축구 역사상 두 번째로 비싼 가격(약 2천억원)에 영입했다. 파리는 온 프랑스인이 사랑하는 스타를 그들의 도시에 묶어두고 싶었고, 카타르는 음바페를 통해 이 구단을 유럽 축구계 대표 브랜드로 키워낸 뒤 자국의 소프트파워로 인정받고 싶었다. 두 욕망의 전면적인 합의로 파리 프로젝트는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으나, 실은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문제는 축구였다. 파리는 숙원 사업이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매년 처절한 실패를 맛봤다. 16강, 16강, 깜짝 준우승과 4강, 다시 16강, 16강…. 슈퍼스타 마케팅을 앞세운 경영전략은 오히려 그라운드 위 균형을 해치며 경기력의 발목을 잡았고, 반복되는 좌절 속에 파리의 청사진은 내부에서부터 신뢰를 잃었다. 리오넬 메시가 미국으로 떠났고, 음바페도 불과 1년 전 서명한 계약 연장 옵션을 거부하며 이적할 결심을 내비쳤다. 파리는 격노했다. 나세르 알켈라이피 파리 생제르맹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만약 음바페가 잔류를 원한다면, 우리도 그가 남길 바란다. 대신 그는 새 계약서에 서명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선수를 공짜로 잃을 수 없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파리는 음바페를 프리시즌 1군 훈련에서 제외했고,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시즌 개막 뒤에도 벤치에 앉혀둘 것이라고 압박했다. 사우디의 제안서가 당도한 건 이 시점이다. 사우디 국부펀드를 대주주로 둔 알힐랄이 7월24일 내민 가격표에 따르면, 이 거래로 파리는 이적료 3억유로(약 4300억원)를 챙길 수 있고, 음바페는 자유계약 신분으로 본인이 바라던 레알 마드리드(스페인)에 가기 전까지 딱 1년 동안 사우디 리그를 뛰면서 연봉 7억유로(약 1조원)를 벌 수 있다.
파리는 딜을 승인했으나, 음바페로서는 협상 테이블에 앉을 이유가 없는 거래였다. 사우디의 제안은 말하자면, 유럽의 더 나은 리그로 가기 전 디딤돌 구실이라도 할 권리를 천문학적 금액을 들여 구매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본질적으로 자국 리그가 ‘짝퉁’을 면할 수 없다는 점을 만천하에 시연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사우디로 향할 경우 챔피언스리그를 뛸 수 없다는 점도 걸렸겠지만, 애초 사우디가 선수의 가치를 책정하는 방식은 음바페의 방식과 달랐고, 돌이켜보면 이는 파리(카타르)도 마찬가지였다.
2023년 여름 ‘음바페 사가(Saga·전설적 이야기)’가 어떻게 일단락될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음바페 없이 이강인, 마르코 아센시오, 마누엘 우가르테 등 젊은 피를 보강한 파리가 챔피언스리그에서 일을 낼 수도 있고, 훗날 음바페가 스스로 ‘이쯤 하면 됐다’ 여기고 먼저 사우디 리그에 손을 내밀며 찾아갈 수도 있다. 다만 2022년 12월, 카타르월드컵 결승전 승부차기 패배 직후 중계 카메라에 잡힌 음바페의 얼굴, 골똘히 허공을 응시하던 메마른 눈과 굳게 다문 입술을 상기하면, 반대쪽에 베팅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월드컵 결승에서 패한 그날, 음바페는 자신의 트위터에 짧게 적었다.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Nous reviendrons) 그의 트위트를 곱씹으며 언젠가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때 음바페의 가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이는 그 자신뿐이었다고.
박강수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 기자 turn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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