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메이저리그로 뛰어든 윤석민은 볼티모어 오리올스로부터 3년 총액 557만달러를 보장받았다. 60억원 남짓한 거액이지만 한국 구단이 그에게 4년간 120억원을 제시했다는 공공연한 소문을 감안하면 헐값에 가깝다. 최고의 야구와 승부하고 싶었던 청년의 꿈 앞에 120억원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평생 ‘야구팬’이라는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살아온 나는 인생에서 단 한 번 야구를 ‘끊은’ 적이 있다. 10년 전, 2004년 6월23일 새벽 1시47분의 일이다(정확히 기억한다). 잠이 오지 않아 TV를 보고 있는데 이라크 무장단체에 납치된 한국인 김선일씨에 대한 뉴스 속보가 떴다. ‘긴급속보 김선일씨 처형’이라는 커다란 자막이 화면을 덮었다. 그 영상이 반복해서 TV 화면을 채우고 있던 그때, 그의 절규하는 모습 아래로 한 줄의 방송 자막이 흘러가고 있었다. “내일의 프로야구 선발투수. 롯데 박지철, LG 장문석”(정확히 기억한다).
죽음의 공포로 울부짖다가 결국 ‘처형’이라는 자막으로 돌아온 청년의 비극 아래로 흘러가던 프로야구 선발투수 예고 자막. 그건 내게 평생 잊히지 않을 단 하나의 컷으로 남았다. 이제 그에겐 없어진 ‘내일’의 선발투수를 안내하는 저 무심한 자막은 차라리 공포스러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야구를 좋아해야 하는가. 그때 나는 더 이상 야구를 보지 않기로 했다. 한 인간의 우주가 파괴된 그 구체적인 세계 앞에서도, 너무나 태연하게 계속되고 있던 프로야구라는 가상의 세계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내겐 2000년대 중반 야구에 대한 기억이 없다.
다시 야구를 보기 시작한 건 2008년, 시련을 딛고 33살에 돌아온 롯데 자이언츠의 2루수 조성환을 본 뒤부터다. 병역법 위반으로 최전성기를 날려먹은 선수가 나이 서른셋에 돌아와 다시 야구로 인생에 맞서던 모습은 내게 삶에 대한 대단한 자극과 영감을 주었다. 그사이 올림픽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의 선전으로 야구팬도 급증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생을 끝낸 날에도,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날에도, 저녁 6시30분이 되면 주심은 변함없이 “플레이 볼!”을 외쳤다.
그러니까, 프로야구는 더 이상 가상의 세계가 아니었다. 어떤 선수는 야구로 가족을 지키고 있었고, 어떤 선수에겐 120억원 따위에 흔들릴 수 없는 꿈이었다. 누군가에겐 연인보다 소중한 것이었고, 또 누군가에겐 삶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였다.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어도, 변함없이 밤이 되면 우리를 찾아와준 것이 야구다. 그 무심함이 가끔 공포스럽기도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야구가 없는 저녁은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야구팬이라는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어울리는 말이다. 그렇게 또 봄이 왔다. 플레이 볼.
김준 사직아재·칼럼니스트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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