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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의 직구

등록 2012-12-15 10:58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이정아 기자

한겨레 이정아 기자

1994년의 어느 날, 22살의 한국인이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구원투수로 등판했습니다. 볼넷을 내주고 안타를 맞으며 1이닝 2실점의 투구로 신고식을 마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박찬호입니다. 다음날 언론에는 ‘메이저리그의 벽은 높았다’라는 관용구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박찬호의 진짜 승부가 시작되었습니다. 거품인가 싶었던 22살의 청년은 마이너리그에서 스스로를 단련하며 세계 최고의 직구를 장착하고 나타났습니다. 하늘로 솟아오르고 몸 쪽으로 휘어지는 직구와 스트라이크존을 쪼개버리는 슬라이더 앞에 메이저리그의 거포들이 얼어붙었습니다. 타자 앞에서 갑자기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박찬호의 라이징 패스트볼은 그야말로 ‘직구라는 이름의 마구’였습니다. 제구가 불안하다는 지적에 그냥 가운데로 꽂아넣으며 타자의 방망이를 박살내고, 위협구를 던진 뒤 욕을 하던 슈퍼스타를 노려보며 침을 뱉은 뒤 앞으로 걸어가던 청년 박찬호의 당당함은 1990년대 중·후반 암흑기의 한국인들에겐 전율이었습니다.

초대형 자유계약선수(FA) 계약 이후 텍사스 시절의 박찬호는 자주 난타당했습니다. 직구는 떠오르지 않았고, 제구는 무너졌습니다. 박찬호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광도 시들었습니다. 그러나 박찬호의 야구는 언제나 계속되었습니다. 다시 마이너리그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팀을 수차례 옮겨다니며, 선발과 불펜, 승리조와 패전 처리를 오가며, 박찬호는 여전히 마운드에 섰고, 조용히, 꾸준히 역사를 써나갔습니다. 그리고 2010년 10월, 마침내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가 가지고 있던 아시아인 투수의 메이저리그 최다승 기록을 넘어서는 124번째 승리를 따냈습니다. 무려 17년에 걸쳐 한 남자가 만들어온 집념의 숫자입니다.

조성민·임선동·차명주·박찬호로 이어지는 유명한 92학번 동기들 중 박찬호는 사실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던 투수였습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운드를 지켜낸 사람은 오직 박찬호뿐입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선수 생활, 20살이 어린 후배들에게 난타를 당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진지했고, 여전히 기합을 불어넣으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국인들이 사랑한 것은 박찬호가 쌓아올린 기록보다, 마흔의 나이에도, 수백억원의 자산가임에도, 2400만원의 최저 연봉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마운드에 서기를 원하던 박찬호의 집념이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는 종종 차범근의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암흑 같던 시절 멀리 유럽에서 날아오는 차범근의 활약상은 그 시절 한국인들의 긍지였습니다. 아마 차범근은 스포츠인으로서는 최초로 세계화된 한국인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세대는 우리 아이들에게 말해줄 박찬호라는 세계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한평생 던져온 직구는 우리 세대의 승부구였습니다. 쌩유 박찬호!

사직아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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