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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선수

한국 축구 공격수 딜레마
등록 2012-10-27 14:18 수정 2020-05-03 04:27

‘공격수 딜레마’에는 답이 없다. 이동국, 박주영, 이동국, (잠깐 손흥민), 박주영, 이동국, (가끔 김신욱), 박주영, 이동국…. 돌이켜보면 한국 축구에 이동국이라는 공격수의 이름이 등장한 것이 벌써 15년이다. 박주영만 해도 10년이 넘어간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의 이름이 대표팀 원톱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이 딜레마가 얼마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것인지는….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뒤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최강희 감독이 한국 축구가 38년 동안 원정길에서 이겨본 적 없는 이란 테헤란의 아자디 스타디움 앞에서 끝내 패배의 분루를 삼켰다. 이제 한국 축구의 월드컵 본선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그랬듯이 불안과 혼돈에 빠졌다.
사실 사람들은 최강희 감독이 계속 이동국을 뽑자, 이동국을 왜 뽑냐고 비난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순수한 비난이었다. 이동국이 골을 못 넣으니, 이동국을 뽑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이동국은 이란 원정을 앞두고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박주영과 김신욱을 썼더니, 박주영과 김신욱을 써서 졌다는 비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공교롭게도 대표팀이 이란 원정에서 패한 바로 그날 약 18시간 뒤 이동국이 소속팀 전북에서 화끈한 발리슛으로 승리를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최강희 감독은 이동국을 뽑아야 했을까?
축구계에서 공격수의 운명은, 종종 너무나 잔혹하다. 예전에는 수비수가 그렇다고들 했다. 유소년 육성을 맡고 있는 축구계 관계자 상당수가 만날 때마다 “아이들이 수비수를 하지 않으려 한다”며 걱정했다. 패배 앞에서 자식이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 두려운 학부모들도 수비수는 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전술 흐름이 바뀌자 이런 헤게모니도 변하고 있다. ‘골 넣는 수비수’는 환영받지만, ‘수비 잘하는 공격수’란 말은 존재감이 없다. ‘한 방’을 해결해주지 않는 이상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차범근 해설위원을 만났을 때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이 1년 동안 경기에도 나서지 못했다며 주영이를 비난하고 있지만, 나는 박주영을 믿는다. 누가 뭐래도 지금 가장 믿을 수 있는 공격수다.” 실제로 박주영은 가장 중요했던 한-일전에서 결승골을 넣었고, 레전드의 믿음은 보답받았다. 하지만 불과 두 달이 지난 지금, 박주영은 가장 수위 높은(?) 표현을 빌리면, ‘한국 축구를 망치는 주범’이 돼 있다.
결과가 좋으면 믿음은 정당한 선구안이라 포장되지만, 결과가 나쁘면 흔들렸던 마음까지 경솔함의 증거가 된다. 이동국을 제외한 최강희 감독은 ‘왜 하필 지금 세대교체를 했나?’라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모두가 찾고 있지만 결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 선수. 한국 축구가 원하는 공격수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결과가 전부인 세상이라면, 정답은 더 아득하기만 한 것 같다.
SBS ESPN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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