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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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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죽이 터지기 전까지

등록 2012-09-07 20:29 수정 2020-05-03 04:26

어떤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한순간이 어떤 사람에게는 예술이자 역사가 된다. 폴 오스터의 단편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오기 렌의 경우가 그렇다. 오기 렌은 미국 브루클린의 작은 시가 가게 점원이다. 그는 가게 단골 작가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준다. 그때 그의 얼굴은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12년간 매일 아침 7시, 자신의 가게 앞 같은 장소를 한 장씩 찍은 사진들의 앨범. 처음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며 사진들을 휙휙 넘겨보던 작가는, 마침내 이 작품의 경이로움을 발견한다. 사진들 안에서 늘 그 시간에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매일 변화하는 얼굴을 발견하고, 계절의 변화를 인식하고,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오기는 시간을,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찍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세상의 어느 작은 한 모퉁이에 자신을 심고 자신이 선택한 자신만의 공간을 지킴으로써 그 모퉁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일을 해내고 있었다.”
폴 오스터는 이 이야기를 신문에 실을 크리스마스용 단편소설의 소재를 고민하다 만난 실화인 듯 꾸며냈지만, 정말 실화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우리는 오기와 비슷한 일을 한 한국 사람 한 명을 알고 있다.
미술작가 양만기씨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이 건설되고 있던 때 베란다에서 그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성산동 아파트 13층에 살고 있었다. 그는 경기장 터를 닦을 때부터 완공될 때까지 1년8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 현장을 사진에 담았다. 오늘은 아침 7시에 찍었다면 다음날은 아침 8시, 이런 식으로 1시간씩 시간을 늦춰가며 매일매일 같은 앵글로 카메라를 고정해두고 월드컵경기장을 찍었다. 월드컵경기장의 건설 기간은 1년8개월이었다. 그의 사진을 죽 늘어놓거나 동영상으로 재생하면, 아무것도 없던 빈터에 월드컵경기장이 세워질 때까지의 과정을 볼 수 있다. 마치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고속카메라로 담아 상세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거기에는 월드컵경기장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시간의 흐름을 박제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동이 틀 때부터 한밤중까지, 꽃이 피었다가 질 때까지, 나뭇잎이 여린 연두색에서 짙푸른 색으로 바뀌고 다시 그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질 때까지, 그러니까 봄·여름·가을·겨울이 두 바퀴를 조금 못 도는 동안, 눈이 오기도 하고 비가 내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기장이 다 지어진 뒤는 다들 알다시피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2002년에 꼬마였든 할머니였든, 선수들은 그곳에 있었고 모두의 눈은 그곳을 향해 있었다. 광화문과 신촌과 번화가와 술집 안에 있던, 약간은 미쳐서 빨간 옷을 입고 소리 지르고 박수 치던 우리를 생각해보자. 그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가 차곡차곡 시간과 함께 쌓아올려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낸 양만기 작가의 작품은 마치 오랜 시간 기다려 폭죽처럼 터지는 꽃망울을 보는 것처럼 완벽한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김지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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