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김연아는 승리했다. 우리 모두가 원하던 그곳으로 그는 올랐다. 13년간 얼음판에서 사춘기를 녹여낸 여성이 가장 높은 자리, 그래봐야 얼음판 위에서 1m가 채 안 되는 높이지만 승자의 모습으로 섰다. 그것은 단순한 금메달 하나가 아니라 또 하나의 승리의 표상이다. 그것은 바로 문화 강국 ‘그들만의 리그’의 오만과 편견에 대한 승리다.
리투아니아 선수들도 울고 간 ‘판정의 벽’
우리만 몰랐던 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금메달의 의미는 이러하다. 피겨에는 네 종목이 있지만 중심은 여자 싱글이며 이것에서 성과를 내려면 발레, 클래식 음악, 마임 연기, 체형, 안무, 의상 그리고 점프 능력과 활주 스피드가 한 덩어리가 되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모두는 서양 문화의 전통이 필요한데, 그 이유는 주관적인 채점 종목인 이 경기의 심판이 대부분 유럽·북미인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눈에 합당해야 점수가 나오는 종목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전에는 영국·독일·오스트리아·노르웨이·스웨덴 등 유럽 문화의 중심국이 주름잡다가 1948년 캐나다의 바버라 앤 스콧이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하며 북미 대륙으로 이 피겨 열풍이 옮겨붙었다. 페기 플레밍, 도로시 해밀, 크리스티 야마구치 같은 미국 선수와 독일의 카타리나 비트가 지배하고, 미국의 미셸 콴과 러시아의 이리나 슬루츠카야가 만인에게 회자되던 종목이 바로 피겨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월드 챔프와 올림픽 챔프는 세계의 혹은 적어도 그 지역의 문화 아이콘으로서 추앙받아왔기에 더더욱 ‘세계 피겨 지도에서 어딘지 모를 나라’에는 영광을 줄 수 없는 종목이다.
한 예가 2002년 올림픽에서 좋은 연기를 펼치고도 5위에 그친데다 뒤이어 열린 월드에서 4위에 그치자 같이 출전한 선수와 코치들이 연판장을 돌려 심판 판정에 항의했던 리투아니아 출신 아이스댄서 드로비아즈코-바나가스 조의 이야기가 있다. 부부인 이들은 남편 바나가스가 결국 그 월드 경기 뒤 “아내의 눈물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은퇴한다”고 선언했다. 여자 싱글에는 아예 그러한 도전자마저 없었다. 철저히 그들의 판이었다.
김연아 선수 역시 2006년 시니어 데뷔 시즌부터 높은 ‘그들만의 판정의 벽’을 느끼면서 여기까지 왔다. 다른 강국 선수들은 좀 부족해 보여도 인정받는 회전수를 김연아 선수는 다 채워 돌아도 묘한 판정을 받거나 조금의 실수가 있으면 가차 없이 큰 감점을 받아왔다. 그랑프리 시리즈 우승은 주더라도 세계선수권대회에 가면 이상한 판정이 나왔다. 지난해 세계선수권이 정복됐지만, 이번 시즌에도 내내 이상한 ‘판정의 벽’의 어두운 그림자가 김연아 선수 뒤에 도사렸다. 작은 것은 줘도 큰 것은 줄 수 없다는 그들 문화 강국의 자존심일까? 우리 그룹이 아닌 곳의 선수니까… 저 나라 선수가 하면 얼마나 한다고… 이러한 오만과 편견. 그것을 이기는 것은 완벽한 연기와 정확한 기술뿐이었다.
2월24일의 쇼트 경기를 돌이켜보자. 바로 앞 순서에 일본의 아사다 마오 선수가 이번 시즌 중 가장 나은 경기를 했다. 자신조차도 믿어지지 않는 좋은 점수 73.78을 받아갔다. 그 바로 뒤가 김연아 선수. 좋아라 하는 아사다 마오의 코치 타라소바를 보며 그녀는 입술을 내민다. 3분만 기다려. 내 시간이야.
피겨스케이팅은 섬세한 멘털의 경기다. 최고 레벨의 선수들은 기술적으로는 대체로 자신이 가진 것을 완벽히 소화하는 수준으로 올림픽을 맞는다. 이번에도 모든 선수가 최고의 컨디션으로 임했다. 다만 그 중압감과 긴장감을 이기지 못해 실수하는 것일 뿐. 그런데 아사다 마오 선수가 좋은 경기를 하고 높은 점수를 받은 뒤에 나서는 김연아 선수의 마음은 어땠을까?
보란 듯이 트리플 연결 점프 3회전 넘겨그러나 김연아 선수는 단 5초 만에 그런 걱정을 날려버렸다. 그렇다. 아무 기술 요소를 시행하기 전이다. 그저 시작 동작만 하고 그 고혹적인 눈웃음을 심판과 관중에게 주었을 때 이미 승부는 났다. “나는 내 경기를 하고 너는 네 경기를 하는 것뿐” 그거였다. 그리고 깨끗하게 모든 프로그램을 끝냈고 78.50이라는 경이적인 세계신기록으로 쇼트 1위를 차지한다.
내 트리플 연결 점프가 이상하다고? 한번 보라고 하듯 3회전을 오히려 좀 넘기는 점프를 해버린다. 두 달 전에 다운그레이드라고 고집 부리던 테크니컬 심판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플립 점프가 문제 있다고 떠들어대던 어떤 나라 언론 앞에다 그래봐라 하듯 역시 3회전을 좀 넘기는 점프를 뛴다. 그러고는 날아다닌다. 4분음표가 되고 8분음표가 되어 퍼시픽 콜리세움을 오선지 삼아 그녀의 음악을 써 내려간다.
다음은 2월26일 프리 경기. 이번에는 김연아 선수가 먼저다. 하늘이 드라마를 쓰듯 바로 다음이 아사다 마오, 그다음이 주최국의 조애니 로셰트. 거슈윈의 의 아름다운 선율에 따라 움직여가는 김연아 선수의 피겨는 바로 자연스러운 ‘흐름의 피겨’다. 보기엔 쉽지만 보라, 여러분이 동영상을 되감아가며 5초씩 본다면 그 자연스러움 흐름 속에 얼마나 꽉 채워진 안무와 고난도 동작들이 숨어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예술이란, 명작이란 이런 것일 게다. 점프 종류 이름을 알 필요도 기초점이 얼마고 가산점이 얼마고 외울 필요도 없다. 왜냐고? 점수는 여러분의 심장에 물어보라. 프리 총점 150.06은 아마도 그 경기를 보던 사람들의 심장 박동 수일 게다. 구성 점수 71.76은 관중의 체온일 게다. 합계 점수 228.56은? 모르겠다. 세계인의 감동 게이지(지수) 정도겠다.
거슈윈의 재즈풍 음악이 올림픽 무대에서 통하겠느냐는 이야기도 시즌 초에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김연아의 거슈윈은 앞으로 20년 이상 회자될 명작이라 생각했다. 음악의 선택, 편곡, 그리고 요소 구성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꼭 맞는 작품, 명작 말이다. 김연아는 스스로 지휘자가 되고 음표가 되어 날아다녔다. 음신합일(音身合一)이 바로 이것이다. 누가 피겨를 스포츠일 뿐이라고 하는가?
쇼트 경기의 기술점 44.70점도 세계 기록! 구성 점수(PCS) 38.80점은 신채점제 첫해에 사샤 코언이 기록한(그리고 그 뒤에는 아무도 비슷하게 얻은 적이 없는) 최고 기록에 겨우 0.16 모자란다. 쇼트 합계 78.50은 당연히 신기록. 프리 경기 기술점 78.30도 최고 기록. 특히 이게 왜 더 의미가 있나 하면 2008년부터 프리 기술 요소가 스핀이 하나 줄어 종전 기록인 73점대도 가까이하기 어려웠단 말이다! 기술? 김연아에게 물어봐라! 프리 구성 점수 71.76은 전인미답의 경지다. 종전 기록이 68점대(역시 2003년의 사샤 코언)이니. 합계 150.06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김연아 외의 선수가 기록한 프리 최고점은 133점이다. 그 트리플 악셀의 기초점이 8.2니까 그걸 두 번 번외로 뛰어 더해야 가능한 점수다.
228.56점은 세계인의 감동 게이지아사다 마오 선수의 노력도 칭찬해줘야겠다. 회전이 모자란 트리플 악셀을 인정해준 것은 심판이지 선수는 아니다. 그는 다만 최선을 다했다. 어머니를 졸지에 잃고 놀라운 분투를 한 캐나다의 조애니 로셰트 선수에게도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오늘의 승리는 개인사적 승리가 아니고 특정 기술의 승리가 아니고 피겨스케이팅의 승리다. 왜 피겨스케이팅이 겨울올림픽의 꽃이고 왜 그중에 여자 싱글이 중심인가를 보여준 승리다. 그 선수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가 왜 중요한가? 아니 이제 그들은 기억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대한민국에서 세계의 피겨 전도사로 일할 김연아를. 아름다움이 오만과 편견을 이겼다. 피겨 역사책은 이날을 어떻게 기록할지 모르지만 내 심장에는 그렇게 기록되었다.
송두헌 용인송담대 컴퓨터게임정보과 교수·피겨 블로거 blog.daum.net/sadprince57
한겨레 인기기사
현대차 울산공장 연구원 3명 사망…차량 테스트 중 질식
‘세계 1% 과학자’ 4년째 재판에 묶어둔 ‘검찰 정권’
‘윤석열 골프’ 두고 “박세리도 국민에 큰 힘 됐다” 점입가경
생후 18개월 아기 가슴에 박힌 총알…두개골 떨어지기도
이재명 지시·묵인 증거없이…‘관용차 혐의 추가’ 법카 유용 기소
‘이재명 법카 혐의’ 기소에…“무혐의 처분인데 검찰 ‘마사지’”
우크라, 러에 에이태큼스 발사…푸틴, 핵 문턱 낮춰
“우크라군, 에이태큼스 미사일 6발 발사” 러 국방부 밝혀
“노무현 전 대통령도 많이 이용”....용산, 윤 ‘골프 논란’에 동문서답
내가 쓰는 폼클렌저, 선크림 잘 닦일까?…‘세정력 1위’ 제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