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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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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치고 일어선 ‘성공 스토리’의 감동

기아 팬도 아닌 이들이 기아 우승을 반긴 이유…
옛 해태 타이거즈 향수에 답답한 정치·사회적 상황도 한몫
등록 2009-11-05 14:15 수정 2020-05-03 04:25

나는 지난 10월24일 잠실구장에 있었다. 기아와 SK의 한국시리즈 7차전이 열린 날이다. 신문 제작이 없는, 그래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토요일이었지만 그 경기를 꼭 보고 싶었다. 야구 담당 기자로서 의무감 때문이 아니다. 응원하는 팀이 있어서 간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기아 타이거즈 팬도, SK 와이번스 팬도 아니다. 그 경기를 보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과연 기아가 12년 만에 과거의 영광을 재연할지 그것이 궁금해서였다.

10월24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SK를 꺾고 우승한 기아 타이거즈 선수들이 경기장 주변을 돌며 축하 행진을 벌이자 팬들이 노란 막대풍선을 두드리며 환호하고 있다(왼쪽 사진). 9회말 끝내기 홈런을 친 나지완이 환호성을 지르며 홈으로 들어오고 있다. 사진 한겨레 신소영 기자

10월24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SK를 꺾고 우승한 기아 타이거즈 선수들이 경기장 주변을 돌며 축하 행진을 벌이자 팬들이 노란 막대풍선을 두드리며 환호하고 있다(왼쪽 사진). 9회말 끝내기 홈런을 친 나지완이 환호성을 지르며 홈으로 들어오고 있다. 사진 한겨레 신소영 기자

나는 그곳에서 드라마를 봤다. 그것도 너무나 극적인, 거짓말 같은 역전 드라마였다. 나지완이 끝내기 역전 홈런을 친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엄청난 함성이 들렸다. 정신이 멍했고 심장이 멎는 듯했다. 다이아몬드를 돌아 홈베이스를 밟은 나지완에게 동료들이 샴페인을 퍼부었다. 나지완이 눈물을 쏟았다. 이종범도 울고 김상현도 울었다. 팬들도 울었다. 여성들은 입을 가린 채 뜨거운 눈물을 쏟았고, 남성들도 눈가에 물기를 닦아냈다. 내 눈가에도 이슬이 맺혔다.

선수·관중 모두 울음바다였던 잠실구장

왜일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타이거즈 팬이 아니다. 그런데 기아 타이거즈의 우승은 감동을 줬다. 경기가 극적으로 끝났기 때문일까?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SK 팬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반대의 결과였다면 내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목이 메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팬이 많은 인기 구단이기 때문일까? 물론 기아와 하위권 ‘엘롯기 동맹’을 맺었던 LG나 롯데가 우승했다면 팬들은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기아처럼 팬들의 ‘충성도’가 높으면서도 오랫동안 성적을 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감동은 ‘그들만의 감동’일 것이다. 기아의 우승은 나처럼 기아 팬이 아닌 사람들까지 눈가를 적시게 했다.

이유는 뭘까? 기아 팬들을 만났다. 그리고 어렴풋하게나마 해답을 얻었다. 우선 기아는 향수와 추억이 있는 팀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아의 전신 해태가 그렇다. 아홉 번의 우승과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은 ‘전설’이 됐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해태 팬들에게는 끊임없이 ‘술안줏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팬들은 아직도 그때 그 경기를 기억하고, 그때 그 선수를 얘기한다.

둘째, 타이거즈는 굴곡 많은 사연이 있다. 바닥으로 추락했다가 다시 일어선 ‘성공 스토리’ 같은 것이다. 타이거즈는 언제부턴가 하위권을 맴돌았다. 모기업도 기아로 바뀌었다. 비록 ‘타이거즈’라는 이름은 남았지만 팬들은 점점 멀어져갔다. 과거 밥 먹듯 우승하던 타이거즈가 우승은커녕 가을잔치 진출도 허덕허덕댔다. 2005년에는 꼴찌도 경험했다.

그런데 2009년 8월, 기적이 일어났다. 기아는 8월 한 달간 24경기에서 20승을 올렸다. 프로야구 28년 사상 월간 최다승이자 최고승률이다. 4월 한때 꼴찌였던 기아가 순위표 맨 위에 이름을 올렸다. 야구장만 가면 이기던 1980~90년대 해태와 다를 게 없었다.

셋째는 그 어느 팀보다 팬들의 ‘충성도’가 높다는 것이다. 기아가 승승장구하자 팬들이 모여들었다. “난 기아 팬이 아니라 해태 팬”이라며 과거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야구장에서 “기아”를 외치기 시작했다.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영화 포털 사이트 ‘맥스무비’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야구팀을 조사했더니 기아가 압도적인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기아는 누리꾼 1104명 가운데 무려 36.5%의 지지를 받았다. 2위 두산(14.4%)의 두 배가 넘는 수치다. 사직구장에 프로야구 최초로 2년 연속 130만 명의 ‘구름 관중’을 끌어모은 롯데도 13.8%에 그쳤다. 집 나갔던 팬들이 돌아왔고, 최근 기아 야구에 반해버린 새로운 팬들이 가세한 결과다. 특히 10~20대와 여성 팬들이 크게 늘었다. 그들은 자기 또래 열아홉 살 안치홍에게 열광하고, 스물한 살 양현종에게 환호한다. 7차전을 잠실구장에서 지켜본 송상미(28·회사원)씨는 “기아가 자랑스럽고, 팬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연고지 광주의 지역 정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집 나갔던 팬들이 그렇다. 이들은 대체로 40대 이상이다. 과거 광주구장에서 을 불렀고, 빙그레 투수 김대중이 마운드에 오르면 “김대중”을 연호했다. 이들은 타이거즈의 돌풍에서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찾는다. 아니, 일부러 찾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연관지어진다. 지난 10월23일, 그러니까 6차전이 열리던 날 광주에서 만난 한 택시기사는 “야당이 되니까 야구를 잘한다”며 껄껄 웃었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 때 아홉 번이나 우승했던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집 나갔던 팬에 10~20대와 여성까지 가세

전남 목포가 고향인 윤병수(47·사업)씨는 기아의 열성팬이다. 그는 한국시리즈 3차전부터 7차전까지 다섯 번 연속 야구장을 찾아 목이 터져라 기아를 응원했다. 386세대인 그는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의 잇단 서거로 텅 비어버린 마음을 야구가 채워줬다”고 했다. 올드팬일수록 12년 만의 타이거즈 우승은 더욱 진한 감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2009년 10월24일 기아 타이거즈가 전해준 감동은 훗날 ‘전설’이 되어 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것이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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