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가까워지면 한 선배는 늘 그렇듯 돌아보며 읊조린다. “월요일이군.” 같은 부서 후배가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등장하면 확신에 차 말한다. “월요일이 맞군.” 배꼽시계보다 더 정확하다는 월요일을 알리는 나의 ‘힐시계’와 후배의 ‘치마시계’다. 스포츠부에 발령받은 뒤 변한 두 가지가 있다. 하이힐 대신 운동화를 신고 치마 대신 바지만 입는다. 대부분의 시간을 경기장에서 보내는 스포츠 기자에게 편한 복장은 기본이다. 야구 등 주요 경기가 없는 월요일이 유일하게 ‘나를 꾸밀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힐·치마 착용 말 것, 선수 따로 만나지 말 것
운동화와 바지를 고집하는 건 취재의 편의성 때문만은 아니다. 스포츠 ‘여기자’에겐 지켜야 하는 암묵적 룰이라는 게 있다. 하이힐 신지 말 것, 치마 입지 말 것, 선수들과 따로 만나지 말 것 등 주로 복장과 태도에 관한 것이다. ‘스포츠 여기자가 지켜야 할 101가지 덕목’ 따위로 규정된 건 아니지만 으레 그렇게 한다. 부서에 오자마자 선배에게 귀에 못이 박이게 들은 것도 이런 얘기다. 개성 시대에 이 무슨 복장 제재인가, 처음엔 황당해도 경험하면 다 수긍이 간다.
하이힐을 신지 말라는 건 그라운드와 코트를 보호하려는 이유가 크다. 뾰족한 힐을 신고 그라운드를 밟으면 구멍이 생긴다. 배구나 농구 코트도 마찬가지다. 선수들의 일터가 기자의 멋 부린 하이힐 때문에 손상되는 건 엄밀히 말해 일종의 업무방해다. 농구 훈련을 취재한다며 킬힐을 신고 코트를 밟는 기자를 보면 구단 관계자들은 ‘아, 초짜구나’ 금세 알아차린다. 쏜살같이 달려와 막아선다. 요령이 생기면 현장에서 운동화로 갈아 신거나 낮은 통굽, 웨지힐을 신기는 해도 뾰족한 킬힐을 신고 운동장을 누비는 여기자는 없다.
치마를 입지 말라는 건 스포츠판이 아직은 남자들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네가 미니스커트를 입는다고 내가 흔들릴 것 같냐”고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훈련에 방해되지 않게 취재를 해야 한다는 게 암묵적인 룰이다. 깊게 파인 야한 옷을 입고 더그아웃을 휘젓고 다니면 혈기왕성한 선수들이다보니 아무래도 훈련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논리다. 선수들과 따로 만나지 말라는 얘기도 연장선이다. 생각 이상으로 보수적인 공간에서 여기자들은 알아서 조심해야 할 게 많다.
스포츠 경기에도 암묵적 룰은 존재한다. 주로 상대에 대한 존중과 예의에 관한 것이다. 야구의 불문율은 책으로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있을 때는 번트나 도루를 해서는 안 되고, 홈런을 친 타자가 과한 세리머니를 해서도 안 된다. 끝내기 홈런이나 데뷔 첫 홈런 등 중요한 의미가 아니라면 타자들은 요란하게 베이스를 돌지 않는다. 공수 교대시 수비수가 마운드를 밟고 지나가서도 안 되고, 퍼펙트게임 같은 대기록을 눈앞에 둔 투수를 상대로 번트도 대지 않는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물을 뿌리는 세리머니를 할 때도 머리 위에서나 등 쪽에서 뿌려야 하는 암묵적 룰이 있다고 한다.
농구에서는 크게 앞서는 상황에서 경기 막판에 작전타임을 불러서는 안 되고, 축구에서 선수가 넘어져 있으면 공을 몰던 선수는 사이드라인 밖으로 공을 차낸 뒤 경기를 중단시켜야 한다. 몸싸움이 심한 아이스하키에서 싸움은 ‘1대1, 맨주먹’이 기본이다. 한국 리그에서는 흔치 않지만 캐나다 등 유명 해외 리그에서는 두 선수가 양 팀 선수들과 심판들에 둘러싸여 맨주먹으로 치고받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를 중단시키지 않는다. 알아서 끝내기를 기다리거나 선수들이 넘어져야 말린다. 2분간 경기에 못 뛰는 페널티는 있지만 중징계는 받지 않는다. 복싱에서는 뒤돌아선 상대를 공격하면 안 되고, 사이클에서는 경쟁자가 사고를 당하면 가속하지 않는다.
불문율의 핵심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선수와 사귄 여기자가 다른 부서로 옮겨야 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암묵적 룰을 어긴다고 불이익을 받는 건 아니다. 경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제재나 벌금은 없지만 대신 복수와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야구에서는 뻔히 보이는 빈볼로 바로 응징에 들어간다. 심하면 징계를 받지만, 암묵적 룰을 어긴 벌이라는 것도 암묵적 룰이다. ‘보복을 해도 상대 타자의 머리로는 던지지 않는다’는 암묵적 룰 또한 지켜야 한다. 달리 ‘응징법’이 없는 종목에서는 징계보다 더 무섭다는 누리꾼들의 비난이 쏟아진다. 지난 시즌 농구에서는 크게 앞선 4쿼터에 작전타임을 불러 양 팀 감독 사이에 얼굴을 붉힌 사례도 있었다.
최근 일어난 한 축구선수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사건도 그런 의미에서 암묵적 룰을 어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지인들만 보는 비공개 공간에서 ‘상사의 뒷담화’를 하는 게 규정 위반은 아닐 것이다. 대표팀 선수는 팀에 대한 좋은 얘기만 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와 선수는 인성까지 겸비해야 한다는 우리의 암묵적 잣대를 깨뜨린 것이라면, 뭇매를 맞고 반복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이 불문율이라는 틀 안에서 제한되는 것이 의문이라는 의견도 나오지만, 어쨌든 암묵적 룰의 핵심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다. 그 합의를 깨뜨리는 행위도, 그에 대한 비난도 존중을 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난 눈물을 머금고 오늘도 운동화를 신는다.
남지은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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