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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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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신도 굴복시킨 징크스의 위력

선수·코칭스태프·프런트까지 크고 작은 징크스 집착
평정심·컨디션 유지 돕는다는 스포츠심리 분석도
등록 2013-08-29 05:38 수정 2020-05-02 19:27

은퇴한 농구선수 서장훈은 한때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경기장에 나왔다. 이유를 물으면 “몸에 열이 많아서”라고 둘러댔다. 비밀은 은퇴 뒤 밝혀졌다. 최근 이실직고했다. “실은 징크스였어요. 급하게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경기장에 온 날 이겨서, 한동안 그렇게 다녔습니다.” 소소한 일에 신경 안 쓸 것 같은 ‘천하의 골리앗’도 “선수 시절 수백 가지 징크스를 달고 살았다”고 한다. 다 이기기 위해서다.

삼성 박한이의 10년 된 ‘준비동작’

막판으로 치닫는 프로야구도 이기기 위한 ‘징크스 타임’이 시작됐다. 매 경기 결과에 따라 순위가 뒤바뀌니, 가을야구행 기차를 타려는 팀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킨다. 감독, 선수는 물론 스태프까지 동참한다.
선수들은 루틴(행동 패턴)에 집착한다. LG의 수호신 봉중근은 팀이 10-0으로 이기고 있어도 5회에는 반드시 스트레칭을 한다. 마무리라 큰 점수차로 이길 때는 등판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한다. 6회에는 비타민을 먹고 7회에는 커피를 마시는 등 스스로 정한 루틴을 지킨다. 삼성 강명구는 경기 전에 샤워를 하고, ‘언더셔츠→팬티’ 순으로 유니폼을 입는다. 강명구는 “쓸데없는 행동인 건 알지만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두산 홍성흔은 경기 전 책을 읽고, 롯데 손아섭은 경기 전 조용한 곳을 찾아 혼자 10분간 명상을 한다. 그는 “하고 나면 타석에서 집중력이 높아진다”고 했다.

SBS 뉴스 갈무리

SBS 뉴스 갈무리

삼성 박한이가 2003년부터 했다는 ‘준비동작’은 유명하다. ‘장갑을 조이고, 소매를 걷고, 방망이를 닦고, 발로 땅을 비비고, 바닥의 금을 지우고, 방망이로 바닥의 선을 긋는다.’ 요즘은 모두 하지 않지만 한때 야구팬들에게 또 다른 재미를 줬다. 모든 동작을 완료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24초. 2010년부터 타자들의 타석 준비 시간이 12초로 제한되면서 몇 가지 동작을 생략했더니 결과가 좋지 않아 모든 동작을 최대한 빠르게 12초 안에 끝냈다는 얘기도 있다.

감독들은 특정 물건에 의미를 부여한다. 염경엽 넥센 감독은 8월 초 새 신을 신고 그라운드에 나섰다. 팀이 연패에 빠지며 4위로 내려앉자 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올 시즌 처음으로 그라운드에서 신는 운동화를 바꿨다. “징크스를 안 만드려고 하는데 사람이다보니 어쩔 수 없다”며 짓는 쓴웃음에 이 변화가 승리의 기운을 가져오기 바라는 간절함이 배어난다. 김진욱 두산 감독은 빨간색 옷을 입고 온 날에 이기면 다음날도 빨간색 옷을 입는다. 6월 연승을 달리자 한동안 면도를 하지 않았다.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은 1982년 두산의 전신인 OB 코치 시절 노란 팬티를 입고 경기에 출전해 이긴 뒤 팬티를 빨지 않고 착용했다는 얘기도 있다.

승리를 향한 마음은 다 똑같다. 각 팀의 더그아웃 기록원들은 팀이 승승장구할 때 사용한 물건을 행운의 부적으로 삼는다. 김호민 두산 기록원은 경기 전 상대팀과 교환하는 오더(출전 선수 명단)를 작성할 때 특정 브랜드의 볼펜만 사용한다. 2007년 신인왕이 된 임태훈에게 선물로 받고 처음 사용한 날 팀이 이겨 6년째 같은 볼펜만 사서 쓴다. 기록지 받침대는 7년째 사용 중이다. “이 받침대를 사용한 첫해 팀이 한국시리즈에 올랐기 때문”이다. 김재환 LG 기록원은 올 시즌 처음 업무를 맡으면서 전임자에게 우승 기운이 담긴 7~8년 된 필통과 기록지 받침대를 물려받았다. 여기에 자신만의 부적을 하나 더 추가했다. 기록원은 보통 빨간색·파란색·검은색이 하나로 된 ‘삼색볼펜’을 사용하는데 그는 색깔별로 따로 쓴다.

“삼색볼펜을 쓰다가 처음 색깔별로 쓴 5월부터 팀이 연승 행진을 달렸다”는 것이다. “왠지 우리 팀이 강한 느낌이 들어” 더그아웃 벽에 붙여놓는 선수 명단을 작성할 땐 LG 선수는 두꺼운 매직으로, 상대팀은 얇은 네임펜으로 적는다. 신동주 삼성 기록원의 필통은 지난해 한국시리즈 우승 때 사용한 것이고, 삼색볼펜은 재작년 우승 때 쓴 걸 심만 바꿔 쓰고 있다.

징크스는 잘만 활용하면 기량 발전에 도움을 준다. 징크스의 일종인 루틴은 실제 그 효과가 입증돼 1990년대 이후 운동선수들의 체계적인 훈련에 적용되기도 했다. 늘 하던 행동을 하면서 심리적 안정을 느끼게 되고, 그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컨디션은 좋은 성적으로 이어진다. 런던올림픽 때 양궁 기보배가 심리적 압박을 이겨낸 것도 루틴 때문이라고 했다. 활을 꺼내고 줄을 당기고 쏘는 평범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완성된 그만의 최적의 폼이 숨어 있다. 골프선수 타이거 우즈도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언제나 같은 루틴을 따르기 때문에 좋은 샷을 할 수 있다. 최상의 샷을 할 준비가 된 상태에서 매 순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고 했다.

너무 의지하다보면 심신 위축될 수도

그러나 징크스는 깨라고 있는 것이다. 내가 부담을 덜려 애써 만든 기댈 곳이다. 너무 믿고 의지하다보면 그에 갇혀 되레 움츠려들 수 있다. 최근 한 선수는 경기장에 오기 전 집 혹은 숙소에서 하던 루틴을 지키지 않고 나와 다시 돌아가 반복 동작을 하고 왔다고 한다. 매일 하던 기도를 상황에 쫓겨 못한 선수는 내내 불안해 경기를 망쳤다고 했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에 행운의 징크스는 덤이 돼야 할 것이다.

오래전 감독 중 오전에 여자를 보면 재수가 없다며 ‘여기자’를 점심 전엔 찾아오지 못하게 해서 갈등을 빚은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그 감독이 승승장구했냐고? 글쎄다.

남지은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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