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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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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문명이고 무엇이 미개인가

다리가 네 개였지만 차별 없이 다른 이들과 섞여 살던 케냐의 여인
뚱뚱한 사람도 장애인도 없고 젊고 활기찬 젊은이들만 즐비한 서울
등록 2014-03-07 15:00 수정 2020-05-03 04:27
서울 지하철 신당역에서 한 장애인이 지하철을 이용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한겨레 박태우

서울 지하철 신당역에서 한 장애인이 지하철을 이용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한겨레 박태우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길 건너편 저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는 게 보인다. 늦겨울 모처럼의 햇볕 속을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다. 자세히 보니 비틀거리는 것이 아니라 절룩거리는 것이다. 그는 한쪽 다리가 불구다. 남루한 행색에 몸을 비척거리며 힘겹게 걷고 있다. 남자의 주위로는 무슨 동심원 모양으로 밀어내는 자력이라도 작동하는 듯, 사람들은 일정 거리를 두고 그를 둥글게 피해가고 있었다. 마치 전염병 환자라도 만난 것처럼, 마치 불량배라도 마주친 것처럼, 그렇게 시선을 돌리고는 잽싸게 지나쳐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어떤 기색도 없이 다만 다리를 절룩이며 그저 제 갈 길을 가고 있는데 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갔을 때였다. 전시실 입구 모퉁이에 어느 노숙인이 등을 돌린 채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 아니라 전시물 인형이었다. 한 곳이 아니라 복도와 로비 여기저기에 여럿 설치되어 있었는데,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눈에 띄지 않거나 혹여 눈에 띈 경우라면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치거나 짧은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마치 거기에 있어선 안 될 대상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처럼 사람들은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이거 시민들 반응을 관찰하려는 몰래카메라 아닌가?’ 그런 의구심이 스치는 설정이었다. 미술품을 감상하러 온 관객과 여기저기 웅크린 노숙인 인형들 사이에는 묘한 긴장과 거리가 있었다.

아프리카 케냐의 병원에서 일할 때 만난 어느 소말리족 여인이 생각난다. 그녀는 놀랍게도 다리가 네 개였다. 선천성 기형으로 날 때부터 그랬다고 한다. 허벅지에서부터 새총 쏘는 나뭇가지 모양으로 다리가 둘로 갈라져서 도합 네 개의 다리가 되었는데 그중 두 개에만 자투리처럼 발이 달려 있었다. 치마를 입고 네 개의 다리가 무릎으로 걷는 그 희한한 모습이라니….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라도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평범한 아낙네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마치 치아 하나 덧니라도 난 것을 설명하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긋 행복한 미소를 띠고 말을 이어간다. 현재까지 별 불편은 없지만 거치적거리는 발을 이참에 떼어내고 싶은데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남들처럼 두 다리로 걸어보는 게 소원이라고…. 마치 쌍꺼풀 수술 조르는 소녀처럼 천진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인은 마침내 수술을 받았다. 수술 다음날 아침 회진을 가니 벌써 뜨개질거리를 손에 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며칠 뒤 의족을 착용하고는 걷기 연습을 시작했다. 병원 마당에서 만나 어떠냐고 물었다. 키가 커져서 좋다며 연신 “무주리 싸나!”(아주 좋아요!)를 외쳤다. 어찌나 몸을 흔들며 크게 웃어대는지 쥐고 있던 목발이 함께 흔들거렸다.

만약 그 여인이 수술을 받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 아마 그랬더라도, 그녀는 명랑한 성품 그대로 별 무리 없이 한 생애를 멋지게 잘 살아냈을 것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고, 발이 없으면 무릎으로 걷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그런데 만약 그 여인이 케냐가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살 수 있었을까? 다리를 네 개 달고도 비장애인들과 다름없이 당당하게 학교에 다니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그런 평범한 삶을 누리고 살 수 있었을까? 집 밖의 거리를 온전히 나다닐 수나 있었을까? 어쩐지 자신이 없다.

업무차 서울에 자주 오는 존이라는 영국인 친구가 했던 질문이 떠오른다. “왜 서울 거리에는 노인이 보이지 않느냐? 왜 불구자가 보이지 않느냐? 어째서 젊고 활기찬 미남·미녀들만 보이냐? 이 나라에는 뚱뚱한 사람도 없고 노인도 없고 불구자도 없는 거냐?” 존에게는 어딜 보나 세련된 사람들만 즐비한 서울 거리가 오히려 이상해 보였나보다. 내게는 마땅한 설명이 단박에 떠오르질 않았다. 무엇이 문명사회고 무엇이 미개사회일까?

김현정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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