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가면 무엇을 주문하세요? 어느 20대 아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커피집에 갔답니다. 부모는 아메리카노를 시켜달라고 했고, 아들은 자기 것을 포함해 아메리카노 세 잔을 들고 당당히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아들은 아버지한테 몹시 혼났습니다. 왜 그랬는지 눈치채셨나요? 부모가 생각한 아메리카노는 의당 따뜻한 커피였고, 아들이 주문한 아메리카노는 당연히 아이스커피였으니까요.
나이 사십을 기준으로 딱 갈린다고 합니다. 사십 이전의 사람들이 주문하는 커피는 물어보나마나 얼음 동동 뜬 차가운 음료라고 합니다. 사십부터는 달라집니다. 몸이 온기를 원할뿐더러 관념상 따뜻하지 않은 것은 차가 아니니까요. 제 친구 하나는 이 얘기를 유심히 듣더니 그다음부터 카페에 가면 무조건 찬 음료를 시키는 거예요. 아무리 뜨뜻한 것이 먹고 싶어도 객기로 찬 것을 시킵니다. 젊어 보이고 싶답니다.
찜통 같은 폭염이 한창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데요. ‘속대발광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있자니 하도 더워서 미칠 것 같아 고함을 지르고 싶다). 옛날 국어책에서 이희승 선생의 수필 ‘청추수제’에 등장했던 두보의 시구가 딱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올해 저는 오랜만에 땀띠가 났습니다. 어린 시절 여름마다 땀띠를 늘 달고 살았던 기억 한편으로 요즈음 얼마나 호강하며 살고 있는지 잊고 있던 고마움이 새삼 떠오릅니다.
오래전 아프리카에서 지내던 때 일입니다. ‘아프리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타는 듯한 태양, 밀림, 열대 동물, 이런 것을 떠올리기 쉬운데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제가 있던 곳은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좀 떨어진 키쿠유라는 곳이었습니다. 그 일대는 적도가 지나가는데도 고도상 해발 1천m가 넘는 높은 곳이기 때문에 상당히 서늘합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극한의 추위도 극서의 더위도 없는 지역입니다. 저는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전부 한여름 옷을 가져갔는데 웬걸 날씨는 한국의 늦가을 같았습니다. 하지만 딱히 난방시설은 없었고 밤이 되면 벽난로에 장작불을 지피는 정도였습니다. 현지인들한테 긴 스웨터를 빌려 입고 지냈습니다.
그렇게 의외의 서늘한 여름 기간을 지내고 11월에 귀국했는데 한국은 이제 동절기가 막 시작되고 있었지요. 즉, 그해 저는 여름을 놓친 겁니다. 삼복 무더위를 건너뛴 채 다시 겨울을 맞는 셈이었습니다. 한창 젊을 때인데도, 사실 그해 겨울나기가 몹시 힘들었습니다. 겨우내 몸이 이상한 것을 느꼈습니다. 딱히 뭐라고 짚을 수는 없는데 몸이 부들거리고 힘을 쓸 수가 없고 무엇인지 몸 안의 중요한 온기가 달아난 느낌이랄까요?
우리 몸은 조상 대대로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추운 날씨에 적응하며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아마 추운 겨울을 잘 이겨내는 힘은 한여름 무더위 때 충분히 받아둔 열기로 우리 몸 어디엔가 그 에너지를 비축해두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한번은 회의가 있어서 싱가포르에 출장을 갔습니다. 그곳은 그야말로 열대지방이지요. 기온이 높고 습하고 정말 숨 쉬기에도 거북할 만큼 대기가 후끈합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대개의 건물은 냉방시설이 잘 설치돼 있었습니다. 어디에나 에어컨이 사시사철 돌고 있는데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에어컨도 잠깐 시원할 때 좋은 것이지 그것을 24시간 365일 켜놓고 닫힌 공간 안에서 호흡하며 산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요. 며칠이 지나자 머리가 무겁고 몸이 후들거리는 냉방병이 찾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차라리 덥더라도 바깥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오늘도 덥습니다. “선생님, 태양에 주사 놔주세요. 열 좀 내리게.” 우리는 즐거운 농담으로 열기를 식히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더위와 땀은 사실 고마운 것이 아닐까요? 앞으로 닥쳐올 한겨울을 대비해 우리에게 추위를 잘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에너지를 주니까요.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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